내일을 그리는
경주 바이브
봄빛 속에서 다시 만나는 APEC 2025
경주의 봄 풍경은 천천히 펼쳐진다. 호수 위로 번지는 벚꽃, 산사에 내려앉은 고요, 첨성대의 푸르름, 그리고 시장 골목의 따뜻한 온기까지. 서로 다른 풍경들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세계가 경주를 찾았던 APEC의 시간 속에서도 이 장면들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또 다른 계절이 시작된 지금, 그 기억은 다시 봄빛 속에서 살아난다.
글 박성하 사진 박진형

사진출처 경상북도 사진공모전 수상작
천년의 사찰, 세계를 품다
불국사의 봄은 고요한 시간의 결을 따라 흐른다. 돌계단과 전각 사이로 맑은 햇살이 스며들고, 숲을 건너온 바람은 사찰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막 돋아난 연둣빛 새순이 천년 고찰의 풍경에 생동감을 더하며 공간 전체에 계절의 온기를 채운다. APEC 기간, 김혜경 여사와 각국 정상 배우자들도 이 고요에 머물렀다. 정갈한 다식과 우전 녹차를 나누는 다도 시간이 이어졌고, 범종각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전통의 숨결이 흐르는 산사에서 한국 불교문화의 깊은 울림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봄이 머무는 호수, 세계가 바라본 밤
봄이 오면 보문단지의 풍경은 조금 더 부드러워진다. 호수 둘레를 따라 피어난 벚꽃이 물가를 감싸고, 잔잔한 수면 위로 하늘과 나무가 함께 비친다. 낮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해가 지면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또 다른 풍경이 시작된다. 2025년 APEC 정상회의가 열리던 그날 밤,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이 호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보문호의 고요한 물결과 도시의 불빛이 어우러진 야경은 경주가 가진 또 하나의 얼굴이었다. 천년의 역사 위에 현대의 풍경이 겹쳐지는 순간, 보문단지의 밤은 세계와 함께 기억될 장면이 되었다.
APEC의 순간을 따라 걷는 여행
세계 정상들이 경주를 찾았던 APEC의 장면들은 이제 여행 코스로 이어진다. 경북문화관광공사가 기획한 ‘경주 APEC 트레일’은 한미·한중 정상회담이 열렸던 국립경주박물관을 시작으로 대릉원과 첨성대, 교촌마을, 월정교, 황리단길 등 신라왕경의 주요 공간을 따라 걷는 스토리 투어다. 정상회의의 기억이 담긴 장소들을 차례로 연결해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으며, 국내 전담 여행사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예약 문의
(주)테마캠프여행사 www.themecamp.co.kr 02-735-8142


별을 바라보던 시간 위에서 세계를 바라보다
첨성대가 자리한 들판은 넓게 열린 하늘과 함께 경주의 시간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봄이 되면 잔디 사이로 연둣빛이 번지고, 바람이 스치며 풀잎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 한가운데에서 첨성대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서 있다. 신라 시대 천문 관측을 위해 세워진 이 구조물은 하늘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를 기록하던 장소였다. 별의 흐름을 읽고 달의 변화를 살피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에서 이어져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첨성대 주변의 풍경은 여러 번 달라졌지만, 이곳이 지닌 상징성은 여전히 또렷하다. 낮에는 넓은 들판과 함께 고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밤이 되면 은은한 조명이 더해지며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경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첨성대는 도시의 기억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세계의 발걸음이 경주로 모였던 지난가을에는 이 공간이 특별한 문화 무대로 활용되었다. 첨성대 일대에서 열린 궁중 공연 ‘역사 속의 연경당’은 전통 의례와 무용, 음악이 어우러진 공연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전통 복식과 우아한 춤사위, 절제된 음악이 어우러지며 고대 유적과 현대 공연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장면이 펼쳐졌다. 오래된 문화유산이 오늘의 공연예술과 만나는 장면은 경주의 깊이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천문을 바라보던 옛 자리에서 문화의 울림이 이어진 그 밤은, 경주가 가진 역사와 문화의 가치가 함께 빛난 순간으로 남았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먹거리 골목
시장은 도시의 일상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커다란 냄비에서는 국물이 끓고, 좌판 위에는 신선한 식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상인들은 오랜 경험이 담긴 손놀림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춘다. 이곳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인과 단골손님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여행객은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며 잠시 골목의 풍경에 머문다. 오래된 가게 간판과 골목의 풍경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시장의 시간을 보여준다. 시장을 걷다 보면 경주라는 도시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APEC 정상회의 기간 동안 중앙시장에는 특별한 방문객들도 찾아왔다. 홍콩의 존 리 행정수반 내외가 골목을 둘러보며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시장의 분위기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머리국밥을 맛본 뒤 깊은 맛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일화는 시장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이야기될 장면이 되었다. 특별한 행사나 준비 없이도 시장의 일상은 자연스럽게 손님을 맞이한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음식과 사람들의 손길이 만들어 낸 골목의 분위기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중앙시장은 경주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자, 도시의 삶이 이어지는 자리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