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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속 경주 찾기 '선을 넘는 녀석들' 따라 신라 한 바퀴

한국관광의 메카 “Beautiful Gyeongju”가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황룡사지 전경
시간의 선을 넘어 1500년 전 찬란했던 신라 속으로
이슬람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세계를 탐험하고 아시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포함한 세계지도를 그렸다. 천 년 전 그려진 이 지도를 통해 최초로 세계에 ‘신라’라는 나라가 알려지게 됐다. 이 지도는 당시 세계와 교류했던 신라의 발자취를 좇는 아주 귀한 사료다. 알 이드리시는 신라에 처음 방문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금이 너무 흔해서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황금의 나라 신라, 여전히 영롱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의 역사를 새로 새기고 있다. 지난 해 MBC에서 방영되었던 교양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의 경주편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찾았던 답사지만 이어도 하나의 근사한 여행코스가 완성된다. ‘선이 넘는 녀석들’ 따라 시간의 선을 넘어 1500년 전 찬란했던 신라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테마 키워드

#당일치기경주여행 #테마여행 #TV촬영지여행 #선을넘는녀석들 #자동차여행 #신라역사여행

#1. 쪽샘유적발굴관

쪽샘유적발굴관 전경 쪽샘유적발굴관 내부에서 보이는 왕릉 쪽샘유적발굴관 내부 발굴중 사진

방송에서 첫 번째 답사지로 정한 곳은 ‘쪽샘지구’다. 수학여행의 메카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행지인 경주이기에 출연진들에게 경주는 그리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쪽샘지구’는 모두가 생소해 했다. 쪽샘지구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신라 초기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포함한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고분공원 ‘대릉원’과 이웃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 쪽샘도 대릉원 지구의 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쪽샘지구를 첫 행선지로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경주에서 유일하게 한창 발굴되고 있는 고분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 적석목곽분인 제44호분의 발굴현장을 국민 모두와 공유하고자 지붕을 덮고 전시 콘텐츠를 꾸며 쪽샘유적발굴관을 건립했다. 발굴 조사가 없었다면 신라는 영원히 땅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 ‘황금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붙게 한 화려한 금관, 금제 허리띠, 당장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것 같은 천마의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 이 모두가 발굴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신라의 고분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무덤보다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온 데에는 무덤의 양식이 한 몫을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무덤 양식은 무덤에 돌방을 만들고 그 안을 드나들 수 있도록 동굴을 만든 굴식돌방무덤이다. 그래서 도굴꾼들이 손쉽게 유물을 훔쳐갈 수 있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은 쪽샘유적발굴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제44호분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 스타일이다. 목곽을 만들어 피장자와 껴묻거리를 모시고, 그 위에 돌무지를 쌓고, 봉토를 또 한 번 덮었다. 도굴하려고 무덤을 팔 때마다 안쪽에 쌓인 돌무지들이 무너져 내려 보물이 있는 목곽까지 닿을 수 없는 구조. 천년이 넘은 고도에서 신라의 흔적을 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궁성이나 사찰 등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터만 남은 경우가 많다. 땅 속에서 빛을 잃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있던 이 황금의 유물을 통해 당시 화려했던 신라의 면모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쪽샘유적발굴관 관람 신청은 사전에 전화로 가능하다.

2020.12 기준 코로나19 상황으로 하루에 50명으로 관람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info. 쪽샘유적발굴관 정보
위치경주시 태종로 788
사전신청054-748-2671
관람시간10:00-17:00
관람료무료

#2.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전경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내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내부

쪽샘유적발굴관에 이어 다음 장소는 국립경주박물관이다. 땅 속에서 발굴한 귀한 보물들을 보존처리 과정을 통해 전시하고 있는 신라의 보물창고. 신라 천년의 역사를 한 장소에서 모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대표전시관인 신라역사관을 비롯해 신라미술관, 월지관 등의 상설전시관 3관과 기획전시가 열리는 특별전시관이 있다. 최근(2020.12.06.) 신라역사관을 전면 리모델링 후 재개관하여 좀 더 나은 전시환경에서 콘텐츠를 관람할 수 있게 됐다. 신라역사관은 신라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일련의 역사를 3실로 나누어 전시했다.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이 감탄했던 천마총 출토 금관과 금제 유물들은 제 2실, ‘황금의 나라 신라’에서 감상할 수 있다. 신라의 문화를 논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불교와 미술’에 대한 전시콘텐츠는 신라미술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지관은 동궁과 월지를 테마로 한 전시관이다. 동궁과 월지 복원모형을 비롯해 월지에서 출토된 나무배, 금동판삼존불좌상과 같은 귀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상설전시관 세 곳에서는 정해진 시간마다 전시해설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니 박물관 관람 전 시간표를 확인하고 해설을 들으며 전시관 관람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야외전시장도 놓치지 말길 바란다.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성덕대왕신종과 웅장함이 돋보이는 고선사지3층석탑 등 국보급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2020.12 기준 코로나19 상황으로 시간당 500명으로 관람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신청을 해야 관람 가능하다.

info. 국립경주박물관 정보
위치경주시 일정로 186
사전신청054-740-7500
관람료무료
관람시간10:00-18:00(일,공휴일 19:00까지, 매주 토, 문화가있는날 21:00까지)
온라인 사전예약제1팀당 5인 이하, 시간당 500명으로 입장제한 (홈페이지 사전예약, 야간연장개장은 현장 접수)
홈페이지https://gyeongju.museum.go.kr/

#3. 무열왕릉

무열왕릉 전경 거북(귀부)과 비석 위에 올리는 머릿돌(이수)가 있는 곳 거북(귀부)과 비석 위에 올리는 머릿돌(이수)

이제 신라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순간, 삼국통일의 역사 최전방에 있던 3총사를 만나러 간다. 그 첫 번째 장소는 태종 무열왕이 잠든 곳이다. 태종 무열왕의 능은 주인이 확실한 왕릉 중 한 곳이다. 왕릉과 멀지 않은 곳에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귀부)과 비석 위에 올리는 머릿돌(이수)이 남아 있다. 이 머릿돌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김춘추는 몰락한 성골 왕족의 후손, 진골이었다.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 하에서 그에게 왕의 자리란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자리였다. 그는 타고난 처세술과 외교술, 지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자신 위에 놓여 있던 유리천장을 깨고 신라 최초로 진골 출신의 왕이 되었다. 모든 리더에게는 유능한 참모가 있는 법이다. 삼국지 유비에게는 제갈공명이 있었듯이,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듯이. 김춘추는 그의 유능한 참모이자 러닝메이트였던 김유신과 함께 변방의 국가였던 신라를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로 올라서게 했다.

info. 무열왕릉 정보
위치경주시 서악동 842
관람시간09:00-18:00(동절기 17:00까지)
관람료성인 2,000원 / 군인 및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

#4. 김유신장군묘

김유신장군묘 전경 김유신장군묘로 가는 길 끝에 보이는 묘 김유신장군묘 입구

김춘추의 러닝메이트,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의 묘가 무열왕릉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정문인 흥무문을 지나 호젓한 오솔길을 거치면, 김유신의 묘와 만난다. 김유신은 몰락한 왕족의 후손이었던 김춘추와 동질감을 느꼈다. 그 역시 몰락한 소국가인 금관가야의 왕손이었다. 그의 눈에 김춘추는 왕이 될 상이었다. 김유신에게는 용맹함과 무예가 있었고, 김춘추에게는 지략과 외교술이 있었다. 환상의 짝꿍이 될 운명. 김춘추와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만들기 위해 김유신은 한 가지 사건을 꾸몄다.
한 날은 유신이 춘추를 집으로 초대했다. 축국 시합을 하다가 유신이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지게 됐다. 유신은 여동생 문희에게 옷고름을 꿰매어 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문희는 춘추의 아이를 가졌다. 본인 역시 몰락한 왕족의 후손으로서, 외국(가야)의 왕손과 인척관계를 맺기가 부담스러웠던 춘추는 이후 문희를 멀리했다. 춘추와의 사돈관계를 통해 연을 맺으려 했던 김유신의 빅픽처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한 가지 방편을 더 마련했다. 선덕여왕이 휘하의 사람들을 이끌고 행차하는 시간, 집 마당에 모닥불을 지폈다. 여왕이 김유신의 집에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여동생이 혼전 임신을 하게 되어 집안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여동생을 화형에 처하겠다는 소동이었다. 전말을 알게 된 여왕은 춘추를 꾸짖으며 책임을 지라고 하였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춘추는 문희와 결혼하였다.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김유신은 춘추와 인척관계를 맺은 것만으로 그와 유대감을 쌓은 것이 아니다. 춘추가 김유신에게 크게 감동한 하나의 사건이 더 있었다. 642년,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 대야성이 함락되었을 때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졌었다. 이후 유신은 큰 전투에서 승리해 백제 장수 여덟을 생포하고 백제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대야성 전투에서 가져 간 춘추의 사위와 딸의 유골을 돌려주면 생포한 장수를 풀어주겠다고 한 것. 끔찍이도 아꼈던 딸과 사위의 유골을 찾은 춘추는 유신에게 크게 감동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서로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다.
한반도에 통일된 나라를 세우자는 대의를 공유했던 두 사람. 왕이 된 김춘추와 상대등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고, 동반자 무열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문무왕과 함께 대업을 달성했다. 673년 79세의 나이로 죽은 김유신은 후대에 그 업적을 기려 ‘흥무대왕’ 또는 ‘흥호대왕’으로 추존되었다.

info. 김유신장군묘 정보
위치경주시 충효동 산 7-1
관람시간09:00-18:00(동절기 17:00까지)
관람료성인 2,000원 / 군인 및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

#5. 황룡사지, 황룡사역사문화관

황룡사 역사문화관 전경 황룡사지 황룡사9층목탑 모형

층층이 사다리 휘감아
하늘로 오르려 하여
주변의 온갖 산수들 한눈에 들어오네
(중략)
동도를 굽어보니 수많은 집들
벌집이나 개미구멍인양 더욱 아득하네.
-김극기의 시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황룡사 역사문화관이었다.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터 옆에 발굴성과를 모두와 공유하기 위해 건립한 전시관이다. 황룡사의 규모는 터만 남은 현재에도 지레 짐작 할 수 있다. 첫 머리에 소개한 시가 고려시대 황룡사9층목탑에 올라 읊었던 김극기의 시다. 얼마나 광활한 규모였을지 그림을 그려본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후 진평왕 6년(584)에 거대한 삼존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지었고,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대사의 권유로 호국 의지를 담은 9층목탑을 짓게 되었다. 탑이 완공된 것이 645년이니 처음 황룡사 건립이 시작된 이후 장장 93년 만에 황룡사가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 세기의 노력과 정성을 쏟은 동양 최대의 사찰 황룡사.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황룡사 발굴조사의 성과와 연구 과정을 전시한 황룡사역사문화관에서 당시의 황룡사를 간접체험해볼 수 있다. 82m에 달했다는 황룡사9층목탑의 1/10 축소 모형탑을 비롯해, 가상미디어콘텐츠, 전시 유물관 등이 있다.

info. 황룡사 역사문화관 정보
위치경주시 임해로 64-19 (구황동)
문의054-777-6862
관람료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관람시간09:00~18:00 (동절기 17:00까지)
주차정보황룡사지황룡사역사문화관 주차장(구황동 707, 무료) 이용

#6.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일출 문무대왕릉 항공사진 해변에서 본 문무대왕릉

선을 넘는 녀석들은 경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첫 장소로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또 한 명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꼽을 수 있는 문무왕의 능을 찾았다. 문무왕의 능은 경주에 있는 신라왕들의 무덤 중 유일한 수중릉이다. 삼국유사에 그의 이야기가 전한다.
아버지 무열왕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그의 아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그는 왕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문(文)과 무(武)에 모두 능했다. 김유신 장군과 함께 당을 한반도 땅에서 몰아내고 마침내 통일을 이룩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큰 뜻을 이뤘지만 죽는 날까지 나라를 안위를 걱정했다. 문무왕은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왜국으로부터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노라 유언했다. 그 뜻을 받들어 아들 신문왕은 선왕의 유해를 육지(능지탑지로 추정)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에 뿌렸다.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양남면 봉길해변에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다. 문무대왕릉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위에서 대왕암을 내려다보면 동서남북으로 물길을 만들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길은 대왕암 안쪽을 항상 잔잔하게 유지해주는 장치이다. 물길 중앙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에 문무왕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길해변으로부터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 자리한 그의 무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죽어서까지 오로지 나라의 평화를 갈망했던 문무왕의 뜻을 되뇌어 본다.

info. 문무대왕릉 정보
위치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26
관람시간정해진 시간 없음
관람료무료

#7. 감은사지

감은사지삼층석탑 전경 감은사지 터 전경 감은사지삼층석탑 전경

유홍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표지 속 그 탑, 감은사지삼층석탑이 있는 감은사의 터로 간다. 감은사는 이름 그대로 은혜에 감사하는 절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 절을 짓기 시작한 문무왕이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이어 신문왕 즉위 2년에 완성했다. 이 절의 완공은 신문왕에게 큰 의의가 있었다. 그 해에 반란이 있었다. 장인이었던 김흠돌이 역모를 꾸미고 난을 일으킨 것. 이 난을 기회로 삼아 신문왕은 진골 귀족들을 몰아내고 조정에 유능한 6두품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신라를 옥죄었던 골품제도를 극복하며 통일신라의 진일보를 꿈꿨다. 장인의 난을 정리하고 감은사를 완공한 신문왕은 아버지와 선조들에게 절절한 편지를 썼다.

무섭고 두려움이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계절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조가 허물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삼국사기 중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장면

선왕의 피, 땀, 눈물 위에 이룩하게 된 한반도 최초의 하나 된 나라, 통일신라의 평화와 발전을 염원하는 신문왕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감은사의 금당터에는 독특한 구조가 있다.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언제든 감은사를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아래에 지하 공간을 만들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지하 석조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금당 앞에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장대하게 서 있다. 평화와 번영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감은사지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바이러스와 싸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기를 빌어 보았다.

info. 감은사지 정보
위치경주시 동해안로 1248
관람시간정해진 시간 없음
관람료무료
메모문화관광해설사 상주(해설시간 10:10-16:30, 성수기 17:00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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