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내 최부자家 후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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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댁(최부자댁)현재
작은댁(교동법주) 건물에서 살다가 바로 옆 향교가 있는 동쪽으로 새로 집을 지어 이사 하였다.
새집을 지을 때 향교보다 낮게 보이기 위해 1미터 정도 집터의 흙을 파내어 건물을 낮게 보이게 하였다.
교촌마을 한옥 중 유일하게 솟을대문을 갖추고 있다. 곳간은 조선시대 민가 곳간 중 가장큰댁 최부자 고택 크고, 곡식 800석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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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댁(교동법주)현재
교동법주 건물로 7대 남강 최언경(1743~18 0 4)과 아들 8대 용암 최기영(1768~1834)이 교촌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이조리에 살던 집을 허물어 교촌 향교 서편으로 옮겨 지은 집으로 최부자 고택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교동법주는 3대 최국선 때부터 집안에서 빚기 시작한 술로 1986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최경이 2대째 기능보유자로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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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새댁(최완 고택)
최현식의 삼남 최완(1889~1927)의 집으로 마지막 12대 부자 최준의 동생이다. 1909년 안희제 등과 대동 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 전개했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때 기록을 보면 상해임시정부 1년 예산이 6만원을 조금 상회하던 시절인데 ‘경북 경주군에서 최완이라는 사람이 현금 2만원을 들고 상해에 나타났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일본인 경주경찰서장은 형인 최준 선생에게 붓글씨를 배운다는 핑계로 3년 동안이나 최부자집을 드나들며 최준 선생의 필체를 따라 쓰다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자 상해로 ‘아버지가 위독하니 빨리 귀국하라’는 가짜 편지를 보내고 이에 형의 편지로 알고 급히 귀국한 최완 선생은 바로 일경에게 체포된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은 혹독한 고문과 오랜 망명생활 속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1927년 형무소에서 출소한지 얼마 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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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새댁(최현교 고택)
1대 부자 최현식의 동생 최현교의 집으로 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이 이 집 큰사위이고, 박상진은 12대 부자작은댁 최준의 4촌 매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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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외 댁(석등이 있는 집)
최현교의 차남인 최영록이 분가하여 살던 집으로 고택스테이 ‘교동석등있는집’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집에 있는 석등은 흥륜사지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고 석등 밑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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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가운데 댁(요석궁)
계파(桂坡) 최윤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12대 부자 최준의 첫째 동생이다.
계파는 '국악천석' '서예천석' '바둑천석'꾼이라고 불릴 만큼 전통예술에 대한 수준이 높았고, 박동진 명창도 율객으로 이곳 사랑채를 수시로 드나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요석궁' 이라는 한정식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