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는 남쪽은 수렴, 북쪽은 환서, 동쪽은 바다, 서쪽은 신서로 동해해변가의 온화한 기온에 옥토를 가진 농어업 겸업의 환경좋은 마을이다. 하서리는 애일, 월아, 오곡, 망정, 진리, 후리 등 7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1리, 2리, 3리, 4리로 형성되어 있다.
하서리(下西里)는 면소재지이며 농상권의 중심지이다. 신라육부촌의 하나인 금산가리촌의 촌장이 입주개척한 후 하서지라 칭해오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부, 1895년 경주군 동해면에, 1914년 부군통폐합시에는 경주군 양남면 하서리, 1955년 월성군에 영속되었다가 1989년 경주군 양남면 하서리로, 1995년 1월1일 법률 제4774호로 도농복합형태의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로 개칭 됨.
환서리는 남쪽이 하서, 북쪽이 나산, 서북쪽이 기구리, 동쪽은 석읍으로 일반영농과 함께 축산도 하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 전방, 송정, 구만 3개 부락에 1리, 2리로 형성되어 있는 토질이 좋은 곳이다.
환서리(環西里)는 1914년 부군통폐합 당시 그 동네주위가 고리 같다하여 고리환(環)자 하서리 되었다 한다.
수렴리는 경주의 최동남 해안의 울산강 동쪽에 접한 동해의 해변 마을이다. 서쪽은 환서, 북쪽은 하서리와 접하며 해안바위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수영포, 관성, 영암, 지경 4개 부락으로 형성되고 1리, 2리로 구분되었다. 어업이 주업이나 농경지가 좋아 농사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옛날 왜적의 침입이 많은 곳이라 성질이 강하며 성공한 사람이 많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 하여 수영포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리명을 수렴리라 하였다.
신서리는 북쪽에 대성광산, 남쪽에 수렴, 서쪽에 상계를 경계로 하고 동남해안에 위치한 광산마을로 자연환경이 좋은 마을이다. 범실, 섬안, 다곡, 지영곡, 고평, 억수 6개 마을이 형성되어 신서리를 이루고 있다.
1914년 부군통폐합시 행정리명이 신서리로 부르게 되었다.
서동리는 남쪽이 울산 강동면에 인접하고, 북쪽은 신서리, 서쪽은 상계리, 동쪽은 수렴리를 경계로 자연환경이 좋아 농촌으로서의 경치가 좋은 곳이다.
장기군 양남면 서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서동리라 하고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신라시대부터 서부 상측에 위치하였다하여 웃서라고 하였고, 서쪽 1.5km 지점에 관문성이 개축되어 있어 전시에는 군인들이 적을 방어하고, 평상시에는 군인들이 부락에 와서 영농을 하였다하여 둔전리(屯田里)라고 하여 오던 중 1914년 부군통폐합시에 서동리(瑞洞里)로 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다.
상계리는 남쪽은 서동리, 북쪽은 기구리, 동쪽은 신서리, 서쪽는 신대리와 접하고 있다. 대하천이 중심지로 흐르고 있어 영농의 적지이다. 특히 울산 강동면 지역경계에 화림, 양지, 서왕 3개 마을이 형성되어 상계리가 되었다.
장기군 양남면 지역으로, 위쪽 개울가가 되므로 상계, 상대라 불렀다. 1914년 부군통폐합시에 행정리명이 상계로 되어 화림, 양지, 서왕 등이 상계리에 속하며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신대리는 서쪽은 삼태봉, 동쪽은 상계리, 남쪽은 울산 농소 그리고 강동면의 경계 지점이다. 옛날 외동읍으로 가는 국도변이라 교통이 편리하고 또 만리성재로 통하는 재만리에 옛날 숯방이었으며 환경 좋은 곳이다.
임진왜란 후 파평윤씨가 개척할 때 새로 지은 집터라하여 신대라 하였고, 이 성내에 어전리(於田里)는 팔송지라고도 하며, 외동읍으로 갈려면 만리(万里)재를 넘기 위하여 어정거린다 하여 어전이고, 옛날 소나무 여덟그루(8樹)가 있었다하여 팔송지(八松地)라고 한다.
기구리의 경계는 남쪽은 상계리, 북쪽은 석읍리, 서쪽은 신대리, 동쪽은 서동리이다. 산세가 서에서 동남으로 동북향으로 되어 있는데 응달편의 동네가 기구리이다.
조선 선조때 박영남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때 크게 용맹을 떨치다 연전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아버지 박인국 장군의 유해를 진주(晉州) 남사까지 운구해 가지 못하고 이곳의 북쪽 산에 묘를 쓴 후 가까운 산의 두들에 정착하여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므로 기구 또는 텃두들이라 불렀다.
석촌리는 남쪽은 신대리, 북쪽은 효동리, 서쪽은 외동읍 입실리, 동쪽은 석읍리를 경계로 하고 있다. 학전, 명대, 용암의 자연부락이 석촌리를 이루고 있다.
장기군 양남면으로 돌이 많았다하여 돌촌, 석촌, 석을촌(石乙村)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석촌리라 하고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석읍리는 대천을 따라 북쪽의 우산봉(牛山峰) 아래에서 남으로 기구리에 접하고, 서쪽은 효동리, 동쪽이 상라리이다. 따라서 교통의 요지이며, 역내 수력이 좋아 농사에 적합한 마을로서 대현, 산림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장기군 양남면이었으며 돌이 많았다하여 돌골 또는 석읍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효동리는 남쪽은 석촌, 북쪽은 죽전, 동쪽은 석읍, 서쪽은 외동읍 개곡리쪽으로 효령재가 있다. 효령, 한량곡, 중산, 남전, 어전, 제원, 월천 등으로 형성되어 1리, 2리로 구분 되었다. 농경지로서 환경이 좋은 곳이다.
상라리는 남쪽은 나산, 북쪽은 송전, 동쪽은 국립 공원인 봉길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상라리로 개칭되었으며, 상라리, 자부리 2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장기군 양남면이었으며, 나아 위쪽이 되므로 웃나아, 웃나, 상라, 상라아지, 상내아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상라리로 하고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 되었다.
※ 6.25사변 전 공비 2명이 생포된 보복으로 1950년 1월 25일 양민 25명을 몰사하고 가옥 12동을 전소한 반공마을이다.
나산리는 동쪽은 나아, 서북쪽은 상라, 동북쪽은 경주국립공원으로 동해안의 영농 적지이다. 또 기후, 토질, 기타 풍속 등이 예절바른 마을이다. 현 큰마을, 새마을, 기액, 지곡 등이 형성되어 나산을 이루고 있다.
나아리는 남쪽은 읍천, 북쪽은 봉길, 서쪽이 나산이며, 동쪽은 바다이다. 서에서 동남으로 생긴 산맥의 陵谷이라 농어업이 대부분이며 해변이 유원지화 되어 있다. 현재는 원자력발전소가 건립되어 옛 모습은 거의 없고 시가지화 되어 상업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장기군 양남면 지역으로, 보리개 옆이 되므로 버릿개, 나아, 내아, 나아지, 나아포, 모포, 모포리 또는 아진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나아리로 하고,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읍천리는 서쪽이 환서, 북쪽이 나아로 동남이 바다이며 완전 해변인데 바위가 해변에 너무 많아 항구 역할이 힘든 곳으로, 1914년 부군통합 당시에 읍천 1리, 2리로 구분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으며, 지금은 1종 항구가 들어서 있다.
읍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읍천으로 된 이후 그대로 오고 있다. 미역,전복으로 소득이 증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