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시설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며 하절기에 초목이 고사(枯死)될 정도로 한해(旱害)가 심하여 언덕에 불을 지르면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탔다하여 아화(阿火)라 칭하였다 함.
선산 박씨(善山 朴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도음(道音)이라 하였고, 그 후 평해 황씨(平海 黃氏)의 선비 황이근(黃以根)의 호가 계은공(溪隱公)이라 호학다문(好學多聞)하고 덕망이 있어 평해황씨 중시조(中始祖)가 되어 일문(一門)이 추앙하고 있으며 계은공이 길을 열었다 하여 도음을 도계(道溪)로 개칭하였음.
이 마을 개척당시 뒷산에 올라 마을 형태를 보니 마을 주위가 흡사 정호(井戶,우물)처럼 지형이 깊고 공곡(空谷,텅 빈 골짜기)에 물이 새어나온다 하여 샘촌(泉村)이라 불러 왔음.
선산 박씨(善山 朴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오동(梧桐)이 많은 것을 보고 '마을에 오동나무와 그 열매가 많으니 장차 봉황이 와서 살겠구나(將棲鳳)' 하며 살아왔다. 그 후 과연 어느날 봉황이 날아와서 오동 가지에 앉아 울고갔다하여 마을이름을 서오(棲梧)라 하였다 함.
이 마을 개척당시 심실(深室)이라 하였고 임진왜란을 피해온 진주 하씨(晋州 河氏) 경현(景賢)이라는 선비가 골짜기가 깊다하여 심곡(深谷)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름.
이 마을 개척당시 심곡(深谷)이라 하였고, 1914년 부군폐합시 도리(道里)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름.
약 1,200년 전 밀양 손씨(密陽 孫氏)가 이 마을을 개척 마을이 번창하라고 사라곡(舍羅谷)이라 하였으며, 그 후 1914년 부군폐합시 사라리(舍羅里)라 개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