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절이라는 이와 견천지라는 이가 약 660년 전에 개척한 마을로 처음에 개국(開局)이라 부르다가, 마을에 깊은 골짜기가 있어 개곡이라 불렀다.
능마을 능지촌(陵旨村), 괘동(掛洞)이라고도 하였다.
구어역이 있었으므로 구어, 구어역, 역촌, 구역이라 하였다.
찬 냇물 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찬내, 냉천이라 하였다.
지형이 노루 형국으로 생겼다 하여 노리골, 녹동이라 하였다.
말(言)과 관련성이 깊은 땅이라 하여 언방(言方)이라고 불렸으며, 방(方) 끝자락에 위치하여 말방(末方)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이 모벌군성 성문에 이르러 삭발(毛伐)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다음 불국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모벌(毛伐) 혹은 모화(毛火)라고 하였다.
개척당시 돌이 많은 뒷산을 울산 사람들이 빼앗으려 하자 소유권 분령을 하면서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하여 문산(汶山)이라 하였다.
신라시대 방어사(防禦司)라는 군영(軍營)이 있어 방어라고 불리었다.
마석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제내 앞 토성계에서 남북으로 갈린다. 남으로는 울산의 태화강으로 북으로는 뱅천을 통하여 형산강으로 흐르는데 마석산 북쪽에서 토해내는 물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북토라 부르게 되었다.
돌이 많은 거랑 가에 위치하여 돌거랑, 돌계(乭溪), 석계(石溪), 도계(道溪), 석을지(石乙只)라 불렀다.
사드랫 거랑 가에 위치하여 사드래, 서드래, 서배(西培), 신계(新溪)라 불렀다.
옛날 김연이라는 선비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청안이씨, 함안조씨 성을 가진 두 선배와 함께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므로 김연이라는 선비의 이름 '연'자와 두 선비의 관향에 '안'자를 따서 연안이라 부름.
신라 때 불국사와 모화리의 원원사 사이에 작은 절 78개가 있어 절과 절 사이의 통로로 마치 복도와 같이 만들었다. 불국사에 들어간 사람은 미리 이곳의 작은 절로 들어와 삭발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는데 불도(佛道)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이 실내로 들어오는 문이라 하여 입곡(入谷, 立谷), 입실(入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돌매, 토상촌(吐上村), 석동(石洞)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의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박고부터 '제내(堤內)', '못안'이라 불렀고, 해방후부터 '제내'라 고쳐불렀다고 한다.
약 300년 전 김별감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때 대나무 숲 동쪽에 자리잡았고 하여 대방, 죽방, 죽전, 죽동이라 불렀다.
장이영(長以英)이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이곳에 장군수(長軍水)인 활수(活水)가 솟아났다 하여 활성이라 불렀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