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레이션 : 때는 통일신라 경덕왕 시절... (비가 내리는 불국사의 풍경)
절 안에 큰스님 한 명과 작은스님 두 명이 모여 방석 위에 앉아있다.
작은스님 1 : "부처님 오신 날이 내일 모레인데. 탑이 완성되질 않으니...!"
큰스님 : "그만하시게. 석공께서는 3년째 절식하며 탑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작은스님 1 :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디 저 석수장이만 그렇습니까? 행사마다 절금이니 우린 뭐 먹고 살랍니까? 얼굴이 반쪽이 됐습니다!"
작은스님 2 :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뭐 어쩌겠습니까? 저렇게나 정성을 다해 짓고 있는데."
큰스님 : "흐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비도 세찰 텐데. 석공의 건강이 염려되는구나...'
거센 빗속에서 석공이 석재를 망치로 내리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절의 지붕 위로 다시 맑아진 하늘이 보인다.
불국사 안에서 큰스님과 경덕왕이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한다.
큰스님 :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경덕왕 : "참으로 오랜만일세. 이것이 다보여래께서 상주하시며 증명한다는 다보탑인가?"
햇살 속 다보탑의 모습이 보인다.
경덕왕 : "과연 천하명공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솜씨로다."
큰스님 : "허나 석가탑은 아직 미완성이옵니다."
경덕왕 : "그 노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큰스님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노인이 아니라..."
경덕왕 : (놀란 눈을 한다) "아니...?"
경덕왕을 알현한 석공 아사달이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인다.
경덕왕 : "정말 자네가 부여에서 온 천하제일의 석공이란 말인가?"
아사달 : "과찬이시옵니다."
경덕왕 : "가족은 있는가?"
아사달 : "그것이..."
밤 하늘에 달이 구름에 반 정도 가려져 있다. 아사달은 작업장 한 구석에 걸터앉아 있다.
아사달 : (달을 올려다보며) '아사녀도 저 달을 보고 있을 거야.'
아사달의 머릿속에 아사녀의 모습이 커다랗게 그려진다.
아사달 : '저 달이 거울이라면 부여에 있을 그녀를 비춰 줄 텐데... 어서 탑을 완성하고 아사녀에게 돌아가야 해!'
나레이션 : 아사달이 다짐을 굳히던 그날 밤 부여에서는...
무덤 앞에 주저앉아 우는 아사녀가 보인다.
아사녀 : (눈물을 흘리며) "흑 흑...! 아버지! 아사달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눈 감으시나요...!
회상 속의 아사녀 아버지 : "대공을 이루기 위해선 자신의 혼을 다 하는 법이다. 아사달은 무사할 테니 염려치 말거라."
아사녀 : "아버지...! 안 되겠어요. 그이를 직접 보러 가야겠어요! 이렇게 그리움에 사무쳐 살 순 없어! 꼭 서방님을 뵈어야 해!"
나레이션 : 그렇게 아사녀는 아사달이 있는 서라벌로 향하며 (짐을 챙긴 아사녀의 뒷모습) 때로는 밥을 얻어먹고 (바닥에 짐을 베고 누워 있는 아사녀) 때로는 노숙을 하며 마침내 불국사 앞에 이르렀다!
불국사 앞에 서있는 아사녀의 뒷모습
아사녀 : (초췌해졌지만 미소 띈 얼굴로) "이곳에 서방님이 있구나!"
나레이션 : 그러나...
작은스님 1 : (아사녀와 마주 보고 호통을 치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어디 아녀자의 몸으로 서라벌 제일 대찰 불국사 경내로 들어온단 말이오!"
아사녀 : (슬픈 표정으로)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곳에서 탑을 만들고 있는 석수가 제 남편이랍니다!"
작은스님 1 : "아니되오! 부처님 나라를 만드는 막중대공을 맡은 사람이 어찌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여자를 만난단 말이오!"
아사녀 : "부디 소식만이라도...! 흑 흑...!"
작은스님 1 : (잠시 시선을 아래로 두고 콧김을 낸다) "........ 어쩔 수가 없소. 불국사 대공가의 방침이라... 대신 내가 신묘한 대안을 하나 말해드리리다."
아사녀 : "......?"
아사녀가 트인 길을 열심히 달린다.
작은스님 1 : "이곳에서 서쪽 10리 쯤에 신령스런 못이 하나 있소이다. 그림자못영지라 하는데... 석가탑이 완성이 되면 그 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오."
큰 연못 앞에 서서 숨을 고르는 아사녀의 모습이 보인다.
작은스님 1 : "그곳에서 지성으로 빌다보면 탑의 그림자를 볼 날도 앞당겨질 거요." '이렇게라도 둘러대면 대충 기다리다 돌아가겠지.'
나레이션 : 그렇게 아사녀는 수개월 동안 연못가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연못 앞에 절을 하는 아사녀의 모습)
아사녀 : (많이 수척해진 모습으로) '서방님 나는 이제 가진 게 없어요. 식량도... 당신을 기다릴 기력도 남아있지 않아요. 이제 내게 남은 건 이 부처님 닮은 바위 뿐이랍니다.'
근처의 바위 하나를 바라보는 아사녀의 모습
아사녀 : (창백해진 안색으로 시선을 돌리다 연못을 보고는) ".....? 서.... 서방님....!?" (비틀거리며 다가간다.)
어느덧 완성된 두 개의 석탑이 불국사 안에 나란히 서있는 것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구경한다.
구경꾼 : "과연 3년이 걸릴만한 대작입니다, 스님!"
작은스님 3 : "그러게 말입니다!"
구경꾼 : "다보탑이 주옥으로 화려하게 꾸민 미녀의 모습이라면, 석가탑은 우람하고 훤칠한 장부의 기상 같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각각 커다랗게 햇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동자승 : "저도 그 석수 어르신처럼 될 수 있을까요?"
작은스님 3 : "너는 수행이나 열심히 하거라. 이렇게 급하게 부여로 떠나다니. 하루라도 빨리 부인에게 가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더니만."
활짝 웃고 있는 아사달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구경꾼 2 : "아니...? 그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구경꾼 1, 작은스님 3 : "......?"
동자승 :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예에...!?"
작은스님 3 : "너는 왜 엿듣고 있느냐?"
동자승 : (안절부절한 표정으로)"그... 그게 참말이라면...!"
동자승이 절을 벗어나 열심히 달리고 있다.
동자승 : '이 사실을 빨리 석수 어르신에게 알려야 해! 서라벌을 벗어나시기 전에...!'
동자승의 외침에 아사달이 돌아본다.
동자승 : "어르신! 어르신!"
아사달 : "...? 아니, 네가 어쩐 일이냐." (가던 걸음을 돌려 동자승에게 다가간다.)
동자승 : "큰일 났어요! 부인께서 서라벌에 와 계셨답니다!"
아사달 : "그게 사실이냐?" (놀라며)
동자승 :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런데... 그게...! 어르신을 기다리며 몇 달을 연못가에 있었다고...!"
연못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가는 아사녀의 모습이 보인다.
아사녀 : "서방님...?"
연못에 아사달의 환영이 비친다. 아사녀는 그대로 연못을 향해 뛰어든다.
아사녀 : "서방님...!"
동자승 : "그런데 며칠 전부터 연못가에서 본 사람이 없대요...! 가지고 있던 짐만 연못가에서 발견됐다고...!"
연못에 가라앉는 아사녀의 모습
아사달 : "그게... 정말이냐!"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풍경.
아사달 : "아사녀! 아사녀! 어디 있소!"
아사녀를 찾아 헤매던 아사달의 눈 앞에 연못 앞 아사녀의 짐 꾸러미가 보인다.
아사달 : (주저앉아 울며) "으흑...! 그렇게나 당신을 만날 날만 기다렸는데...! 흑 흑...!"
나레이션 : 그렇게 슬픔에 젖어있던 아사달은 그녀를 지켜주던 바위를 조각하여 부처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부처의 모습은 아사녀의 미소를 닮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밝은 하늘 아래 미소를 띈 부처상이 보인다.)
찾아다니며 너를 새기련다.
바위면 바위에 돌이면 돌몸에
미소 짓고 살다 돌아간 네 입술
눈물 짓고 살다 돌아간 네 모습
너를 새기련다.
- 신동엽 '너를 새기련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