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오(皇吾)’라는 명칭은 신라왕궁의 부근에 있다고 하여 ‘황촌(皇村)’이라는 명칭과 동경잡기의 6방중 5번째 방이라는 의미의 ‘황오방(皇五坊)’이 합성되어 칭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황오리(皇吾里)’로 바뀌었고, 1955년 시제실시에 의해 ‘황오동(皇吾洞)’으로 고쳐 불렀다.
‘성동동(城東洞)’은 조선시대 말기에는 경주군 부내면(部內面) 지역이었고, 1931년에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경주읍에 편입되었다. 고려시대에 경상도의 행정중심지였던 이곳에 토성을 쌓고, 조선시대에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뒤 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다고 하여 ‘성동리(城東里)’라고 하였다.
'동부동(東部洞)'은 경주읍성(慶州邑城)안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동부(東部)', '동부리(東部理)'라 불렀다.
'북부동(北部洞)'은 경주읍성(慶州邑城)안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북부(北部)', '북부리(北部理)'라 불렀다.
'서부동(西部洞)'은 경주읍성(慶州邑城)안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서부(西部)', '서부리(西部理)'라 불렀다.
'노동동((路東洞)'과 '노서동(路西洞)'은 조선조때 봉황대(鳳凰臺)를 기준으로 봉황대(鳳凰臺)를 동서로 구분하여 '노동(路東)'과 '노서(路西)'로 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