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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조선말기 : 경주군 내서면
  • 1910.10 : 경주군 서면으로 개칭
  • 1913.03 : 면사무소를 모량리에서 현 건천리로 이전
  • 1917.10 : 광명동을 경주면에, 고지동을 영천면에 편입
  • 1928.01 : 19개 행정리동을 29개로 분동
  • 1952.07 : 29개 리를 35개 리로 분동
  • 1955.09 : 경주읍의 시 승격으로 월성군 서면으로 개칭
  • 1973.07 : 11개 법정리, 24개 행정리로 분리, 건천읍으로 승격
  • 1989.01 : 월성군 명을 경주군으로 환원
  • 1995.01 : 시군통합으로 경주시제 실시

유래

  • 건천리(乾川里)

    마을은 약 150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하였다. 마을 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어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태종23년에 경주 대도독부,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에 예속, 1895년 경주군 서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부군통폐합 시 마을이름을 건천(乾川)이라고 하였고 1973년 읍(邑)으로 승격하면서 건천읍 소재지가 되었다.

    • 건천(乾川)[마을] : 거치내, 건치내라고도 하며, 천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건천(乾川)[내] : 거치내, 건치내, 건천내라고도 하는 건천 앞으로 흐르는 내.
    • 건천교(乾川橋)[다리] : 건천 앞 국도에 있으며, 모량과 아화를 잇는 다리이다.
    • 건천읍장(乾川邑場)[장] : 건천에 있는 건천읍의 시장으로 건천장, 서면장이라고도 했다. 예전에는 3일, 8일에 섰으나 지금은 5일, 10일에 장이 선다.
    • 작원(鵲院) : 신라 제29대 무열왕 때 김유신(金庾信)장군이 백제를 정복하고자 군사 5만을 인솔하여 왕성을 떠나 30리쯤 되는 이곳에서 첫날 진을 치고 있을 때 서쪽에서 까치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날아와 진영의 상공을 날다가 대장기 끝에 앉았다. 군사들은 그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여 진중(陳中)이 어수선해지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김장군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까치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니, 까치는 땅에 떨어지면서 홀연히 여자로 변신하였다. 그 여자는 다름아닌 백제의 공주였다. 김유신의 군사가 백제를 침공한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까치로 변해서 염탐코자 신라군의 진지로 날아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장군은 까치가 이미 백제의 공주임을 알고 소리쳤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빌었고 이런 까닭에 이곳을 작성(鵲城)이라고 불렀고 마을이름을 작원이라고 하였다..
    • 김유신장군 기간지주[기둥] : 건천2리 206번지 안기복(安基福)의 집 앞뜰에 있는, 화강석으로 된 둥근 사다리꼴의 기간지주이다. 전설에 의하면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작성(鵲城)에 주둔시킬 때 이곳에 기(旗)를 달기 위해서 세운 것이라 한다.
    • 고지마을 : 고지(高旨)마을이라고도 하며, 건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덕고개[고개] : 건천의 동북쪽에서 대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 숨은도랑[보] : 건천의 서남쪽에 있는 봇도랑으로, 은보(隱洑)라고도 한다.
    • 잘감들 : 건천 북쪽에 있는 들.
  • 금척리(金尺里)

    금척(金尺)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금자(金尺)를 주었는데, 꿈을 깨보니 손에 금자가 쥐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꿈에 가르쳐준 신인의 말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唐)의 황재가 사신을 보내어 이 신기한 금자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이를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38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금척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금척'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 웃말 : 곡산한씨(谷山韓氏)가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금척의 위쪽에 있으므로 '상리(上里)' 혹은 '웃말'이라고 한다.
    • 아랫말 : 영천이씨 집성촌으로 금척의 아래쪽에 있으며, '하리(下里)' 혹은 '아랫말'이라고 한다.
    • 새각단 : 순흥안씨(順興安氏)가 모여 사는 아랫말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 '신리 (新里)' 혹은 '새각단'이라고 한다.
    • 오방골 : 약 70년 전 이곳에 사과밭이 일구어지면서 생긴 마을로, 이 마을에서 다섯 갈래의 길이 통하므로 '오방곡(五方谷)' 혹은 '오통곡(五通谷)'이라고 부른다.
  • 대곡리(大谷里)

    약 400년 전 형성된 마을로 골짜기가 매우 크다고 하여 '한실' 혹은 '대곡(大谷)'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나주임씨(羅州林氏) 집성촌.

    • 숲리 : 신라 때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하나 크게 발전하지 못하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개척되었다. 마을 옆에 큰 숲이 있다고 하여 '숲리', '숲각단' 또는 '신리(新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제내(堤內) : 마을 앞에 신라 때 만들어진 줄못이 있었는데 줄못이라는 이름은 못에 줄풀(水草)이 많이 나서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도 '줄못안', '못안마을', '못안제내(堤內)'라고 불렀다는데, 지금은 그 못은 보이지 않는다.
    • 수미리 : 숲리마을과 서로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숲의 가장 아래쪽인 꼬리부분에 있다고 하여, '수미리' 혹은 '수마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구리(邱里) : 300여 년 전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언덕 위에 마을이 있으므로 '구리' 혹은 '군말', '군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당(新堂) : 한실 서쪽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로, 구리가 번창함에 따라 약 200년 전 하나 둘 이주해 온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일구어 '신당'이라고 하였다. 다른 이야기로는 마을 앞에 연못이 있으므로 연당가에 새로 집을 짓고 마을을 일구었다고 하는 뜻으로 '신당'이라고 했다고 한다.
    • 오통곡(五通谷) : 조선시대 중기 마을이 처음 생길 때 다섯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혹은 마을로 다섯 갈래의 길이 통하므로 '오통곡', '오통골'로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 갈전(葛田) : 약 300년 전 나주임씨(羅州林氏) 성을 가진 어느 이가 무성한 갈대밭을 치고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그 후 '갈전', '갈밭'이라고 부르게 되었음
  • 모량리(牟梁里)

    신라 육부촌 중 세번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에 속했으며 '점량부(漸梁部)', '모량부(牟梁部)'라 불리었고,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0년경)에는 '장복부(長福部)'라고도 불러왔다. 이곳에 보리가 잘 되었다고 하여 모량(牟良)이라고도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1914년 일본인들의 나쁜 의도로 행정구역통합 시에 모량(毛良)으로 불리었다가, 1998년에 지역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확실한 고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모량리(牟梁里)로 변경되었음.

    • 행정(杏亭) : 약 300년 전 마을 주민들이 살구나무를 많이 심어 마을이 살구나무숲을 이루었는데 그때 살구나무 정자가 있다고 하여 '행정' 혹은 '살구징이'라고 하기도 한다.
    • 삼교(三橋) : 이 마을에 3개 방면으로 통하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하여 '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안모량(內牟梁) : 모량리 서쪽 산의 기슭에 있는데, 모량리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안모량' 혹은 '내모량(內牟梁)'이라고 한다.
  • 방내리(芳內里)

    마을이 단석산(斷石山) 기슭에 있는데, 산에 둘러싸인 품이 마치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방내(房內)'라고 불렀다고 한다. 단석산 속에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고 하여 '방내(芳內)'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 큰마을 : 방내를 구성하는 본 마을로서 가장 주민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큰마을' 혹은 '중리(中里)', '중마을'이라고 부른다.
    • 모시밭각단 :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모시를 많이 재배하였으므로 '모시밭각단'이라고 하였으며, '저마전(苧痲田)'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 고양터 :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즈음 절이 많던 곳으로 백성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많이 바치던 곳이라고 하여 '공양(供良)터'라고 하다가, 세월이 흐르게 되니 '고양터', '괴양테'라고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 말암(馬岩) : 말을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던 때에, 이곳에 말을 많이 먹였다고 하여 '마전현(馬轉峴)'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말을 매어 두던 바위의 이름을 따서 '말암' 혹은 '말바우', '두암(斗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송선리(松仙里)

    약 400여 년 전 임진왜란 후에 오천정씨(烏川鄭氏)가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소나무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송전(松田)'이라 하였다고 한다.

    • 선동(仙洞) : 옛날 복두암 선인대(仙人臺)에 8선녀가 매일 밤 내려와 중업암(中業岩) 용정(龍井)에 목욕하며 놀다가 올라갔다라고 해서 '선동'이라 불려졌다 함
    • 달천창(達川倉) : 신라 때 병사들이 주둔했으며 병기(兵器)를 보관하고 창고를 지은 자리라 하여 '창리(倉里)'라고 하였다 한다. 혹은 '창터', '말천', '달래', '달래창(達來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산성(山城) : 약 150년 전부터 화전민들이 나무를 치고 이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1300여 년 전 신라가 백제의 침공에 대비했던 산성(山城)이 이곳에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산성'이라고 했다.
    • 절골 : 약 300년 전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마을을 개척할 때, 신라시대의 절터가 있었다 하여 '절골' 혹은 '사곡' 이라고 불렀다 한다.
    • 우중굴(雨中屈) : 신라 때 위증이라는 당 태조의 신하가 이 마을에서 수도하였다고 하여 '우중골'이라고 부르다가, 송산(松山)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인 고로, 구름이 덮이고 어두워지면 곧잘 비가 몰려온다고 하여 '우징곡(雨徵谷)', '우중굴'이 되었다.
  • 신평리(新坪里)

    약 400년 전 이덕유(李德裕)라고 하는 이가 마을을 일으킬 때 지형을 보니, 마을 뒤 능선이 마치 울타리같이 둘러싸여 있는 고로 '신기촌(薪基村)'이라고 부르다가, 그 후 못을 막고 '못밑', '제하(堤下)', '부아미'라고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 수룽굴 : 약 200년 전 경주정씨(慶州鄭氏)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못을 막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느날 못에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끼고 용이 이곳에서 등천을 하였다고 해서 '수룡(水龍)' 또는 '수렁', '수룽굴'이라고 한다.
    • 돈지(敦地) : 약 300년 전 박춘(朴春)이란 이가 야산에 마을을 세웠다고 하여 '둔지'라고 부르다가, 약 150년 전 돈제라고 하는 선비가 유림계(孺林契)를 시작하여 '돈지(敦地)'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원신(元薪) : 마을을 개척한 지 300년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 마을을 일굴 때 인근의 들에 섶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섶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 못이 생기면서 새로 이들이 생겼다고 하여 '새들'이라 불렀고, '셉들' 또는 원래의 신평이란 뜻으로 '원신평(元薪坪)'이라고 불렀다. 드물게는 이웃마을 사람이 이 마을 사람들을 놀릴 때 여근곡(女根谷) 마을 아래 있다고 해서 '십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모길(模吉) : 약 450년 전 처음 마을을 개척한 사람은 손씨(孫氏)였으나, 파평윤씨(坡尹氏) 가문의 선강(善康)이라고 하는 이가 가척(加尺)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그 후 이 마을의 어떤 과부가 수절하여 다른 사람의 본보기 즉 모범이 되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모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가마골 : 약 100년 전 김씨(金氏) 성을 가진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골짜기의 형상이 마치 '가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곡(釜谷)' '부동(釜洞)'이라고 이름 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 가잣골 : 약 450년 전 파평윤씨가 개척한 마을로, 어떤 모녀가 못 밑에서 여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오다가 이야기를 채 다 끝맺지도 못하고 마을에 닿게 되었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가척(加尺)'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조선 연산군때 갑자사화를 피해 이곳에 온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의 조카 윤신(尹信)이라는 이가 가랑사라고 하는 절 옆 지척거리에 살았다하여 ' 가척'이라 불렀다고 한다.
    • 가랑골 : 약 100년 전 가척 마을이 번창함에 따라 주민들이 이곳까지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때 이곳에는 가랑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가랑골'이라 했다고 한다.
  • 용명리(龍明里)
    • 장승(長承) : 약 100년 전 과수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마을 남쪽 큰길 거리에 돌로 만든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장승(長承)' 혹은 '장생이'라 불렀다. 지금은 장승의 행방은 알 수가 없고, 마을 이름만이 '장승'으로 남아 있다.
    • 새마을 : 약 370년 전 임진왜란 때, 경주김씨(慶州金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 성을 가진 두 사람이 마을을 새로 일구어 '새마을', '새마실'이라고 한다.
    • 밀구(密耳) : 구미산으로 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용암(龍岩)이 있었던고로, 용암의 용(龍)자와 명장(明莊) 마을의 명(明)자를 따서 '용명(龍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혹은 귀가 없는 미륵불이 있었다고 하여 '밀이촌(密耳村)' 또는 '밀귀'라고 부르던 것이 그 후 '밀구'로 바뀌어 불려졌다 한다.
    • 명장(明莊) : 파평윤씨(坡平尹氏) 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하였다. 깊은 산골이라 산나물이 많아 부근에 명성이 났다고 하여 '명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깊은 산골에 마을이 있어서 호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 탑골(塔谷) :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버리고 그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라 때의 3층 석탑이 마을 옆에 있었으므로 '탑골' 혹은 '탑리(塔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 웃명장 : 명장부락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상명장(上明莊)' 이라고도 하였는데, 6.25동란으로 민가가 철거되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 조전리(棗田里)

    약 400년 전에 백이소(白以昭)의 후손이 개척한 마을로, 이 마을이 시작당시 이 일대가 야생 대추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대추밭', '조전(棗田)' 또는 '대수촌(大樹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길각단 : 1919년 중앙선 철도와 함께 국도가 개설되고, 대곡리와 연결되는 길목에 과수원이 조성되면서 마을이 생겼다고하여 '길각단', '도변(道邊)'이라고 불렀다.
    • 강당(講堂) : 백대청(白大淸)이란 선비가 개척을 하였는데 대추밭에 딸린 마을이다. 증참판(贈參判) 백이소(白以昭)를 추모하기 위해 광산사(光山祠)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래서 '강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곳에 글을 가르치는 강당(講堂)이 있었으므로, 마을이름을 그대로 '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박실 : 박호(朴浩)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그 이름을 따서 '박실' 혹은 '박곡(朴谷,珀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천포리(泉浦里)

    하천가에 마을이 있어 '천리(川里)'라고 하다가, 논에 도랑보를 만들고 나서 '도랑목'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천포(泉浦)'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부산(富山) 밑에 있으므로 '부산촌(富山村)', '부산(富山)', '덕산(德山)'이라고도 불렀다.

    • 역전(驛前) : 경주에서 영천 간에 철도 중앙선이 놓이고 건천역이 생기면서, 역을 중심으로 해서 생긴 마을이다.
  • 화천리(花川里)

    본래 경주군 서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곶으로 되어 곶내, 고내, 고천이라 하였다. 다른 이야기로는 골짜기에 꽃이 만발하여 꽃내라 부르다가 뒤에 화천(花川)으로 고쳐 불렀다는 아야기도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고백리를 병합하여 화천리로 하였고, 1973년 건천읍에 편입되었다. 뒷들․뒷골․적치를 화천1리, 욉실․새밭마을․개오지골을 화천2리, 백석․태봉․새터를 화천3리로 하였다.

    • 개오지골 : 신전의 남쪽 약 1km 되는 곳에 있는 작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새밭마을이 생기기 전 이곳에는 범이 살았는데, 인근 마을의 개를 물어다 잡아먹고 뼈를 버려, 개뼈가 쌓인 골짜기라 하여 ‘개오지골’혹인 ‘견골곡(犬骨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뒷골 : 약300년 전 적치(赤雉), 뒷들 등에서 주민들이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로, 뒷들마을 뒷골짜기에 있는고로 ‘뒷골’혹은‘후곡(後谷)’이라고 한다.
    • 백석(白石) :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 냇가에 꽃이 많다고 하여 ‘꽃내’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하며, 약 350년 전 밀양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하여 ‘백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화천리의 위쪽이 되므로 ‘윗동’이로고도 하는데 너머에는 내남면의 빌기가 된다.
    • 새밭마을 : 욉실과 뒷들에서 주민들이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었는데, 마을이 섶밭 옆에 있다고 하여 ‘섶밭마을’,‘섶들’혹은 신전(薪田)이라 불렀다고 한다.
    • 새터 : 약 150년 전 백석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마을을 개척하여 새로 일구었다고 하여,‘새터’혹은‘신기(薪基)’라고 불렀다고 한다.
    • 욉실 : 약 300년 전 김춘복(金春福)이란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외진 곳에 있다 해서‘욉실’이라고 부르다가, 물이 구슬처럼 맑다고 하여 ‘옥수(玉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마을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흙탕물이기 때문에 마을이름을 ‘오수(汚水)’,‘오실’이라고 불러오다가, 은진송씨(恩津宋氏) 성을 가진 한 부인이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아들을 데려다가 어려운 가정살림 가운데서도 남의 밥을 얻어 먹이면서 훌륭히 키웠으므로, 그 후 마을이름을 ‘옥수(玉水)’,‘옥동(玉洞)’으로 바꾸어 불렀다. 은진송씨가 키운 아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위해 싸움터에 나가 큰 공을 세우니, 빛나는 전공으로 3등공신이 되었다.
    • 적치(赤雉) : 약 350년 전 밀양박씨(密陽朴氏) 가문의 원혁(沅赫)이란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그런데 뒷산 밭에 농사를 지어 추수할 대쯤이면 꿩이 날아와 농작물을 해쳐 피해가 막심하므로, 용한 이에게 물으니 이곳 지세가 꿩이 불에 타는 형국이라 하여, 붉은 꿩을 그려 밭 주위에 붙여 두니, 꿩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마을이름을 ‘적치’라고 불렀다.
    • 태봉(胎峰) : 신라 대 태자의 태를 이곳에 묻었더고 하여, ‘태봉’또는 ‘안태봉(安胎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