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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신라왕도인 경주의 북천 북쪽에 위치하여 천북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고, 고려시대 계림부, 조선시대 경주부에 속하였고, 그 후 1906년 천북면으로 되었으며,
  • 1955년 경주읍이 시로 승격 경주군이 월성군으로 군명이 개칭되고 황성, 용강, 동천이 경주시로,
  • 1973년 청령리가 안강읍에, 1975년에는 북군, 손곡리가 경주시에 편입되었고, 1979년 희망촌이 신당리에 이주하였고, 1989년 군명칭 환원에 따라 다시 경주군 천북면으로 불리다가, 
  • 1995년 시․군 통합으로 경주시 천북면으로 9개 법정리에 17개 행정리가 있다.
시대별 명칭 변천 현황을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대한민국, 명칭유래 순으로 나열한 표입니다.
시대별 명칭 변천현황 명칭유래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대한민국
천북 계림부에 소속
(충렬왕34년, 1308년)
경주부에 소속
경주부윤의 관할
(현종 9년,1668년)
경주군 천북면
(1906년)
월성군으로 개칭
(1955.9.1)
경주군으로 개칭
(1989.1.1)
경주시로 개칭
(1995.1.10)
신라왕도인 경주의 알천 또는 경주의 북천 북쪽에 위치하여 천북이라 칭함

유래

  • 동산리
    • 동산은 최현익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음. 당시 마을 가운데로 개울물이 흘러 늪을 이루고 있었음. 약 280년 전 유한지라는 사람이 늪 아래쪽에 다시 마을을 개척하여 '늪마을'이라 부르다가 1914년경부터 동산이라 부르게 되었음.
    • '새터'는 조선중기에 대홍수로 말미암아 마을이 폐허가 되었는데 조선 현종 때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새터' 또는 '신기', '새각단'이라고 하였다함.
  • 덕산리
    • 덕산은 약 1,000년 전 황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불방' 또는 '화방'이라 불러왔음. 마을에 화재가 잦아 화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덕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덕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마을 뒤의 산이 마치 '노적'처럼 산세가 평탄하므로 마치 한국인의 덕스러운 모습을 느끼게 한다고 하여 '덕산'이라 불렀다고 함.
  • 신당리
    • 신당은 신라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이곳에 신당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거기에 연유하여 '신당'이라고 하였음.
    • '대밑'은 조선 태조 때 허성구라는 선비가 대나무가 울창한 산 아래에 마을을 일구고 '대밑', '대하'라고 하였음.
  • 모아리
    • '모아'는 옛날 이 마을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몸에는 털이 유별나게 많고 체구가 컸으며 금방 걸어 다녔고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어느날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오므로 뒤에 이름을 '모아' 또는 '모의'라고 부르기도 함.
    • '사잇골'은 모아와 배락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사잇골', '새골' 또는 '간곡'이라 부름.
    • '배락골'은 옛날 이 마을 한 가운데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매년 많은 열매가 달리나 결실기가 가까워지면 항상 익지 못하고 낙과가 되므로 '배락골' 또는 '이락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 '노린골'은 비만 오면 모래가 흘러내려 황톳물과 토사가 이 마을의 들을 덮었는데 노리미기 아래에 있었다고 하여 '노린골' 또는 '황곡', '황동'이라 불렀음.
    • '새터'는 일제시대 신작로가 생기면서 그 도로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 또는 '신기'라고 부르게 되었음.
  • 오야리
    • '오야'는 마을 앞의 넓은 평야가 매우 기름지고 비옥하여 '옥야'라 부르던 발음이 변하여 '오야'로 바뀌어 불리게 됨.
    • '외실'은 오야남쪽에 있는 마을로 신라 때 기와를 굽던 기와굴이 있었으므로 '와실'이라 불러오다가 발음이 변하여 '외실'로 불러지게 됨.
    • '서평'은 옥야들 서쪽에 있다하여 '서평'이라 불렀음.
    • '한백이'는 옛날에 한발이 극심했던 곳이라 하여 '함백이', '한박'이라고 부름.
  • 물천리
    • '물천'은 '무내', '물천' 또는 '퇴산'으로 불렀으며 옥동, 용락, 무내, 목실 4개 자연부락을 병합하여 물천리로 하였음.
    • '용락'은 신라 경순왕 때 이 마을 깊숙한 곳에 조그마한 못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이곳에서 뱀이 용으로 변하여 등천하면서 꼬리를 치니 못이 터지고 계곡이 생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하여 '용내기', '용락', '용락곡'이라 함.
    • '목실'은 옛날 대낮에도 사나운 짐승이 출몰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울창한 수림을 없애고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여 '목실' 또는 '목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 '옥동'은 신라 때 이 마을의 앞산에 옥정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그 계곡에서 옥이 많이 출토되어 '옥골' 또는 '옥동'이라 부르게 되었음.
  • 갈곡리
    • '갈곡'은 신라무열왕 때 칡넝쿨이 우거진 산간의 땅을 개척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 하여 '치실' 또는 '갈골', '갈곡'이라 불렀음.
    • '삼막골'은 옛날 이 마을에 막집 3개가 있었다고 하여 '삼막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큰 골짜기 3개를 밭으로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해서 '삼밭골', '삼박골'이라 부르다가 발음이 변하여 삼막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남아골'은 신라 때 이 마을에 부처가 있는 방향이 남쪽이라 하여 '남아골'로 불렀음.
    • '양지마을'은 마을이 햇볕이 잘 드는 남향 양지 편에 있다하여 '양지마을', '양지촌'이라고 부르게 되었음.
  • 성지리
    • '성지'는 신라시대에 '광곡'이라 부르다가 조선 초기 소리지라는 작은 못이 생긴 후 이 못 둑에 올라서면 봉덕사 종소리가 잘 들린다고 하여 조선 정조 때의 선비 손여원이 못 이름을 성지로 바꾸게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소리못', '성지', '소리지'라 부르게 되었다함. 또 황곡택이 있었으므로 '광곡역'이라 불렀는가 하면 손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소리지리, 소오리라고도 한다.
    • '중방'은 제방을 따라 형성된 세 개의 자연부락 중의 하나로 성지와 강정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방'이라 부르게 됨.
    • '강정'은 물 맑은 냇가에 경주최씨 문중의 정각이 있었으므로 '강정'이라 부름.
  • 화산리
    • '화산'은 마을동쪽에 있는 연화봉에 올라가 보면 분지를 중심으로 둘러져있는 산들이 마치 꽃잎처럼 보인다고 하여 '화산'이라 하였다고 하며, 주위의 산에 계절마다 많은 꽃들이 피어 '화산', '꽃뫼', '곶메', '곶마'라고 부르기도 함.
    • '용사골'은 이 마을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깊은 웅덩이가 많은데 생긴 모양에 따라 '칼용치', '호박4용지', '길용치', '함용치'로 부르고 있으며, 제일 큰 웅덩이인 길용치에 살던 숫뱀과 그 아래 호박용치에 살던 암뱀이 서로 만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추곡', '용사골', '용사곡', '용소곡'이라고 불렀다고 함.
    • '흥림'은 이 마을의 산에 검은 바위가 많다고 하여 '먹방골'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 숲이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조선철종 때부터 흑림이라 불렀으나, 이 마을이 쇠잔해 갔으므로 다시 마을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일제시대부터 '흥림'으로 불러오고 있음.
    • '새터'는 약 80년 전부터 화산 남쪽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생겼으므로 '새터' 또는 '신기'라 부르게 됨.
    • '나리'는 신라시대 라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곳에 난을 피해왔다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난이 평정된 후에 그 선비가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므로 뒤에 사람들이 그 선비의 성을 따서 '나리'라 부르게 외었다고 하며 또는 '나리밭골'이라고도 부름.
    • '진대땅'은 마을을 싸고 있는 산의 모양이 길고 야트막하게 뱀처럼 누워 있으므로 '땅 긴 대망이 땅', '긴대땅', '진대땅'이라고 불러오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