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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삼한시대

    진한의 음즙벌국으로 성립

  • 신라시대

    파사이사금 23년에 비화현이라 칭함

  •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 안강현으로 개칭
    • 의창군(현 영일군)으로 귀속
  • 고려시대

    현종 9년 경주군 안강현으로 복현

  • 조선시대
    • 태조 때 귀성현으로 개칭
    • 정종 때 안강현으로 복현
    • 태종 13년 경주부에 속함
    • 고종 32년 경주부를 경주군으로 개칭
  • 근대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주군 강서면으로 개칭
    • 1949년 안강읍으로 승격
    • 1955년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 군명칭을 월성군으로 함
    • 1973년 천북면 청령리를 안강읍으로 편입
    • 1995년 경주군을 시로 편입
    • 2016년 8월 29일 안강읍(책임읍) 승격(북경주행정복지센터)

유래

원래 안강은 무인 하천 지역이었으나 칠평천 유수의 변천으로 민가가 형성되었고 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안강리

    신라 경덕왕 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여 안강이라 부르던 것을 그대로 읍 소재지 마을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 북부리 : 안강읍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북부리라 부르게 되었다.
    • 대추밭 각단 : 지금의 안강2리 부근. 대추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한일합병으로 일제가 경주군 강서면 안강리를 설치하여 행정을 할 때 신사를 이곳에 두고 일본 천황에게 참배케 한데서 유래되었다.
    • 개버들 : 현 안강2리와 안강3리 사이 근계도로변에 개버들이란 지명이 있었는데 옛날 웅덩이 옆에 버드나무가 있어 개버들이라 불렀으며 대추밭 각단에서 스며나오는 물이 이 웅덩이로 들어와 수리시설이 없던 시대에는 벼농사의 샘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볼 수 없다.
  • 양월리

    신라시대에는 양월방이라 하다가 약 70여 년 전 마을 주위에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달을 보면 마음이 쾌활하였다고 하여 양월이라 칭하게 되었다.

    • 새각단, 신평 : 옛날 신라 때부터 수양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양월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곳에 집이 들어서고 주민이 늘어나 새로 생긴 마을 같다하여 새각단 혹은 신평이라 불렀다. 이곳은 광복 전에 없었던 시장이 새로 생기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현재 안강읍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 구강 : 조선 태조가 안강현을 구성현으로 고쳐 부를 때, 마을의 동남쪽에 거북을 닮은 산이 있어 마을을 구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익재 이재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구강서원을 세워서 이 마을을 구강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거북은 물이 있어야 산다고 믿어 마을 앞에 연못을 파고 항상 물을 가득 채워 두었는데 그로 인해 일부에서는 마을을 구강(龜江)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창마을 : 신라시대부터 이 마을에 군량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창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월성이씨가 많이 살아온 마을인데 이 마을에는 용두지란 큰 연못이 있었다. 그 용두지로부터 수로를 만들기 위해 파헤치니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는데 그 후로는 월성이씨 가문에 벼슬길이 막혔고 자식이 성하지 못했다 한다. 그 이유는 용두지의 수로를 파헤칠 때 솟은 피는 용의 머리가 잘린 탓이었다고 한다.
    • 칠평 : 옛날 큰 홍수가 나서 안강 전역이 물에 잠겼을 때, 이곳의 일곱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았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땅모양이 칠(七)자 모양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 소평 : 약 100년 전 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넓은 평야 중앙에 있는 작은 구역이라 하여 소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 육통리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능골 : 신라 흥덕왕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원당 : 1500년경 월성김씨가 개척하여 족친 간 집단부락을 형성하였는데 인근부락중 제일 위쪽에 있다하여 으뜸원(元)자를 붙여 원당이라 칭함. 일설로는 고려시대 때 이 마을에 원절이라고 하는 큰 절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 존당 : 육통 남쪽 마을. 고려시대 존제(尊制)선생이 마을을 개척하여 존당(尊堂)이라 하다가 조선시대에 서당이 있었다고 존당(存堂)이라고 한다.
    • 못밑 : 신라 42대 흥덕왕릉을 축조할 때 지관이 능 앞에 못이 있어야 좋다고 하여 앞에 못을 막았다. 그 못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는 그 못이 존재하지 않는다.
    • 황새말 · 학지 : 조선시대 정래우(鄭來祐)라는 선비가 처음 개척할 당시 마을에 참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황새가 이 나무에 와서 서식하였다고 하여 학지라 부르게 되었다.  
    • 거리동 · 거리마을 : 육통 서쪽에 있는 마을. 동제를 지내던 거릿대가 있다.
  • 노당리

    신라시대부터 안강에서 의창군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신라이후 조선시대까지 오래된 가옥이 많다하여 노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을 개척한 안동권씨의 호를 따서 `노당'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산대리

    조선 중종 24년(1529)에 이세발(李世發)이란 이가 처음 마을을 개척할 때, 황토흙에 암석과 토대가 산과 같다 하여 산대(山垈, 山臺), 또는 산대뱅이(山垈方)이라 했다.

    • 홍천 :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뒤 이 마을에 홍씨가 들어와 개척하였다고 하여 홍천이라고 불리어졌다. 또 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큰 개울이 흐르고 있어 비만 오면 큰 피해를 입었다 한다. 현재는 그때의 큰 개울이 없어졌지만 당시에 심어 두었던 개울가의 나무들이 고목이 되어 지금도 서 있다.
    • 새터, 새태, 신기 : 원래는 홍천을 통틀어 불리었고 마을의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새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늘어나서 마을이 새로 하나 더 생겼다하여 조선 말엽부터 새터라고 불렀다.
    • 김생 · 김신이 · 금성 : 병자호란 때 충청도 지방에서 거주하던 청안이씨 金城公 李地(금성공 이지)가 난을 피하여 영남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을 개척하여 지명을 금성이라 불렀다.
    • 수일(水一) :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 청안이씨와 설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이곳은 안강읍에서 가장 물이 맑은 마을이라하여 수일(水一)이라 불리어 왔으며 현재는 공장이 들어서서 주민 모두가 이주하였다.
    • 구부랑 : 피일 앞 들에 물을 대는 보가 멀리까지 구불구불하다 하여 '구부랑'이라고 불렀다. 측량기술이 없던 시절에 물길을 내려고 할 때, 고양이가 눈밭을 지나간 자국을 따라 봇도랑을 냈더니 꾸불꾸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피일 : 수일 서북쪽 마을.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로 피난을 왔으며 피난 중에 식량이 부족하여 피(稷 - 벼과 식물)를 뜯어먹고 연명하였다 하여 `피일'이라 한다.
    • 석정 : 약 300년전 홍대명(洪大明)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때 장군수(將軍水)라는 돌우물이 있었는데 그래서 마을이름을 '석정'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물을 먹고 힘센 장사들이 많이 태어나 못된 짓을 하므로 불안해진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우물을 메우니 그 뒤엔 장사가 나오지 않아 태평하였다.
    • 중말 · 중리 : 밀양박씨가 개척하였으며 마을이 넓은 들판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리(中里)라 불리었다.
    • 화전(花田) : 약 100년전 박토에 목화밭을 일구며 개척한 마을. 늦가을이면 눈송이처럼 흰 목화가 만개하였으므로 화전이라 불렀다.
  • 옥산리

    자옥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옥산(玉山)이라고 불렀으며 원래 옥산서원이 있는 골짜기 안의 마을을 지칭하였으나 현재 인근지역으로 팽창하여 영천-포항간 국도변까지 포함하는 큰 마을이다.

    • 면내(眠內)약 200년 전 산에서 약초를 캐던 김씨가 실신하여 며칠동안 냇가에서 잠을 자다 깨어나서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 계정 : 독락당 뒤의 정자. 조선 중종 때의 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42세때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세웠다. 계정이라는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며, 정자의 좌우에는 회재선생이 심었다는 조각자나무(천연기념물 115호)가 있다. 양진암(養眞庵)이라고도 하며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다.
    • 절곡 : 400년 전 절이 많이 건립되어 있던 골이라 하여 절곡이라 전해오며 빈대가 너무 많아 현재는 절이 없어졌다고 함
    • 삼거리 : 자옥산과 어래산과 무학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마을. 영천과 노당과 포항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는 마을.
    • 원당골 : 옛날 원(元)씨 성을 가진 정승이 개척했다는 마을.
    • 서원마을 : 옥산서원이 있는 마을. 옥산서원은 옥산리 7번지 자옥산 밑에 있는 서원.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541-1553)을 제향하는 서원. 1572년 경주 부윤 이재민이 선비들과 함께 사당을 세우고, 서악의 향현사(鄕賢詞)로부터 이언적의 위패를 옮기고 선조 임금으로부터 옥산서원이란 사액과 서적을 하사받았다.
    • 중보 : 신라 때 설씨가 옥천에 보를 막고 농토를 일구었데 그 후 못을 막고 중곡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 하곡리

    지형이 마치 불화(火)자 모양이라 하여 적화오리(赤火五里: 노실, 야일, 너더리, 두류, 딱실의 다섯 마을)라 하였는데, 마을에 화재가 빈번하자 재앙을 면하기 위해 마을 앞에 웅덩이를 팠다. 그러자 주산인 삼성산(三聖山)에 항상 안개 걷힐 날이 없으므로 마을 이름을 `노을실'이라 하다가 노실(露室, 蘆室)의 뜻을 따서 하곡(霞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는 해가 질 때 안강에서 서쪽 하늘을 보면 노을이 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노을실'이라 하다가 하곡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강교리

    강서면(江西面)과 판교리(板橋里)의 이름을 따서 강교리라 하였다.   

    • 너더리 : 300년전 홍씨, 하씨가 마을에 살면서 강을 건너기 위해 큰 나무를 베어 널판자로 다리를 만들어 판교(板橋) 또는 `널다리'라 한다.
    • 야일(也日) : 강교에서 가장 큰 마을. 250년전 신종철(申鐘哲)이란 선비가 마을을 일으킬 때 양곡(陽谷)이라 하다가, 권씨 성을 가진 선비가 마을 서쪽산 모양이 이끼야(也)자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也日(야일) 또는 야(也)는 천자문(千字文)의 마지막 글짜이므로, 안강에서 볼 때 `해가 마지막 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일'이라부르게 되었다.
  • 두류리
    • 딱실 : 현재 두류2리의 저수지 주위를 말하며 마을에 닥나무가 많았고 그 닥나무로 한지를 생산한다고 딱실이라 불렀다.
    • 평지말 : 딱실 서북쪽 평지에 있는 마을
    • 화산곡 : 평지말 남쪽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로 산천이 수려하여 봄철에는 산야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므로 화산곡(花山谷)이라 한다. 산나물이 많이 난다. 옛날에는 가내공업으로 한지를 생산했다.
    • 사박골 : 1580년 경 우봉이씨가 처음 개척하였고 선비가 많이 났다고 하여 士朴(사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 널기미 : 딱실 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 뒷산이 마치 거북이 등과 같다하여 일명 판구미(板龜尾), 인근 마을 중에서 제일 먼저 생긴 마을로 신령님께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간직한 좋은 마을이란 뜻에서 `널귀미'라고도 한다.
    • 점말 : 사박동 남쪽에 있는 마을. 신라 때부터 옹기 굽는 마을로 조선을 거쳐 광복 직전까지 옹기를 굽는 마을이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의 흙이 먹(墨)을 만드는 점토(點土)로 되어 있다.
  • 근계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시내의 근원이라고 해서 근계라 칭함.

    • 가마실, 금속 :  근계1리. 약 300년전 추석화(秋碩華)란 이가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 형태가 가마같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하여 가마실이라 하였다. 신라 때 가마가 있던 곳으로 토기조각이 대량 출토되었다. 지금은 풍산금속 공장이 들어섰다.
    • 곤실 : 안강읍 칠평천 이남을 수남이라고 하는데 수남 지역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은 이가 많다고 하여 책권(卷)자와 열매실(實)자를 써서 권실이라 하는데 차차 곤실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 갑산리

    신라 때 甲山寺(갑산사)의 이름을 따서 갑산이라 칭한 자연부락 명칭을 그대로 사용함.

    • 댓마을 : 백제군이 침입하여 왔을 때 신라군이 패하자 말을 대밭에 숨겨서 피신하였다고 하여 죽촌, 대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 사들, 사평 : 조선 순조때 박종식(朴宗植)이란 선비가 적은 비에도 홍수가 나고 그때마다 이 마을에 모래가 쌓인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 대동리

    신라때부터 마을 규모가 가장 크다고 큰마을, 한골, 한동, 대동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대동리라 하였다.

    • 박동 : 한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박이 잘 되는 곳이라 하여 박동이라 불렀다하며, 일설로는 박씨가 많이 살고 있다하여 박동이라 칭함.
  • 검단리

    동북쪽에 곤제산(昆弟山), 동남에 천마산(天麻山), 서쪽에 삼봉산(三峰山), 북쪽에 무릉산(武陵山) 4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가마솥 같다하여 금당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검단리로 하였다,

    • 검단 약수탕 : 약 100년 전 대 가뭄시 창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울 따라 우물을 팠는데 청석에서 물이 솟는 것을 발견하고 더 많은 물을 얻고자 깊이 팠지만 그 깊이 외에는 물이 나지 않았으며 거품이 섞인 물이 나와 그때부터 약수라 했으며 그 후 탄산수로 편성되었는데 떫은 맛이 있고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 안태봉 : 검단과 현곡 소현, 나원 사이에 있는 높이 337m의 산. 이 산에 신라 역대 왕의 안태를 묻었다는 안태총(安胎塚)이 있다. 가뭄이 극심하여 임산부가 이 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왔다는 전설이 있다. 기우제를 올리던 제단이 남아 있다.
  • 사방리

    형산강에서 범람하는 홍수를 막는다는 뜻에서 사방이라 불리어 오다가 그 후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사방리(士方里)라고 개칭함.

  • 청령리

    청령은 신라시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정착할 당시 산골짜기에 푸른 대나무가 울창하여 `푸른재'라 불렀다. 약 400년전 공인석(孔仁錫)이라는 이가 이 마을에 정착한 후로 곡부공씨(曲阜孔氏)의 문중 마을로 내려오면서 청령(靑令)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