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우즈베키스탄 중동부에 자리잡고 있는 사마르칸트주의 주도 (북위 39°39′15″ 동경 66°57′35) 아무다리야강의 지류인 제라프샨강의 하류에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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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80㎢ (해발 702m) |
기후 | 대륙성 사막기후 |
인구 | 500,000명 (2012년 기준) 분포 : 우즈벡인 71.4%, 러시아인 8.3%, 타지크인 4.7%, 카자흐인 4.1%, 타타르인 2.4%, 고려인 1.0%, 유대인 0.3%, 기타 |
종교 | 이슬람 88%, 동방정교회 9%, 기타 3%(유대교, 기독교 등) |
언어 | 우즈벡어, 러시아어 |
통화 | 숨(Cym) 1$=약1,800숨 (2013년 현재) |
시장 | Shukulov Akbar(슈쿠로브 아크바르) |
시청주소 | 59A Jomiy, Samarkand city, Republic of Uzubekistan |
전화번호 | +99866-235-6992 |
홈페이지 | http://www.samshahar.uz |
3개의 메드레세로 둘러싸여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동양 건축물의 집결체로 꼽힌다. 메드레세는 중세 이슬람의 신학교를 말하며,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의미한다. 메드레세는 신학과 함께 천문학,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등을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레기스탄에서는 과거 왕에 대한 알현식, 공공집회가 열렸다. 이 광장은 15세기 및 17세기에 두개가 더 증축되어 이슬람 종교 건축물인 울르그벡 마드르샤(좌), 시르도르 마드리샤(우), 티라카리 마드리샤(중앙)에 둘러 쌓여 있다. 현재도 레기스탄 광장에서는 매년마다 대통령도 참석하는 '빛과 소리의 제전'을 여는데, 여기서 티무르 제국의 사라진 영화를 볼 수 있다.
3개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며, 티무르 손자 울르그벡에 의해 1417년 건축 개시하여 1420년에 완성되었다. 주로 이슬람 신학 대학으로 천문학, 철학, 수학 연구소로 사용되었으며 티무르 제국의 학술 연구의 근원지였다. 입구 문에는 "학예를 연마하는 것은 모든 이슬람 국민의 의무"라고 쓰여 있다. 지진과 18세기 초의 전쟁 등으로 입구의 돔 등 몇 몇 부분이 파손되었다.
티무르 제국 이후 이 지역을 통치한 우즈벡 영주인 야한그도르에 의해 1619-1636년에 건설되었다. 현관에는 아기 사슴을 쫓는 사자와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본래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숭배를 부정하여 기하학적 문양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메드레세 내의 그림은 영주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담게 했다고 한다. 현재 우즈벡에서 통용되고 있는 200숨 짜리 지폐 도안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야한그도로 바하도르 영주에 의해 1647년 건설되기 시작해 1660년 완성되었다.이슬람 대학과 종교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티무르 왕이 1404년 손자(마흐무트 술탄)의 전사를 추도하기 위해 지은 청색의 중세건축 양식의 사원 건물로서 티무르 일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티무르는 스승을 존중하여 자신의 묘보다 스승의 묘를 더 크게 만들도록 유언하였는데, 이에 따라 구르에미르에서 제일 큰 묘는 티무르 스승의 묘이다. 돔의 하부 벽에는 코란의 문구가 문양화되어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글이 씌여져 있다. 푸른 타일로 화려한 모양이 장식된 돔은 64개의 나무가 내장되어 골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로로 무수한 흠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돔의 축조 기술은 티무르 시대에 창조되었으며 사마르칸드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묘의 내부에는 티무르 자신과 아들, 손자 및 스승과 당시 지도자들의 석관이 있다. 티무르의 묘는 연옥으로 만들어졌으며 흑녹색을 띄고 있다. 유해의 머리는 모두 메카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유해들은 돔의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1941년 학자들이 이 무덤들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티무르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불구가 됐고 울루그벡은 목이 잘려 암살당했다는 사실이 유해를 통해 증명됐다.
비비하님 모스크는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비비 하님은 티무르의 8명 아내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다. 비비 하님을 위해 짓도록 했다는 이 모스크는 티무르 사후 3년 후에 완성됐기 때문에 정작 티무르 자신은 이 장엄한 예술품을 보지 못했다. 현재 과거 파괴된 부분을 개보수하고 복구작업에 들어가 있는데, 재정 지원이 되지 않아서 완공 일자가 늦추어지고 있다.
8세기 아랍 침입 이후 형성된 이슬람교도들의 묘지로 주로 14-15세기간에 걸쳐 11개의 묘를 건설하였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 쿠삼(Kusam)과 티무르 일족, 울르그벡의 은사, 자녀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샤히진다 내부의 첫 번째 푸른 돔이 있는 건물이 울르그벡 일족의 묘이며, 계단 끝 왼편에 푸른 빛 아라베스크 모양의 묘가 조카 딸 샤드무르크의 묘이다. 푸른 색 모자이크 타일이 매우 인상적이다. 사마르칸트 사람들은 지금도 푸른 빛의 아름다운 영묘에 찾아와 기도를 드린다.
1428~1429년에 걸쳐 티무르 손자인 울르그벡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그의 사후 내분에 의해 일부분이 붕괴되었다. 현재 천문대의 기본 골격과 6각형 천체관측기의 지하 부분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높이 40m의 관측 돔이 있었다. 태양, 달, 행성의 고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지구의 위치와 시간을 결정하였으며, 당시 측정한 1년은 실제 기간과 1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고 한다. 울르그벡은 티무르의 손자이자 위대한 학자, 천문가, 정치가였다. 특히 그가 이룩한 천문학적인 업적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울루그벡이 세웠던 천문대는 20세기 들어 발굴됐는데 당시 페르시아 등지에서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별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를 통해 놀랄 만큼 정밀한 천문관측이 이뤄졌으며 이 성과는 17세기 유럽으로 전파됐다. 현군 울루그벡이 암살 당한 이유가 이 같은 그의 학문중시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참지 못한 승려들의 사주를 받은 그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대 소그드족의 수도였던 마라칸다가 지금의 아프랍시압으로 알려져 있다. BC6세기 중반 소그디아나는 아케메이드제국에 속해 있었는데, BC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AD4~6세기에는 실크로드 대상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는데, 당시 시외곽에 조로아스트교, 불교, 기독교사원이 건설되었다. 8~9세기경에는 동방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사마니드의 수도로서 번창하다가, 13세기 후반 징기스칸에 의해 황무지로 변했다. 이 박물관에는 8세기 이슬람이 침략하기 전의 궁전터와 벽화, 도자기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벽화에는 신라 조우관을 쓴 사신이 등장하고 있어 당시 신라와의 교류 흔적을 엿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