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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 1914년 4월 1일 : 경주군 내동면 천군리.
  • 1955년 1월 1일 : 경주군 덕동출장소에 편입.
  • 1955년 9월 1일 : 시제 실시에 따라 아동(牙洞) 지역은 천군2동으로 개편 운영.
  • 1973년 7월 1일 : 천군2동이 구정동, 시래동과 함께 정래동으로 운영. 천군1동은 천군동으로 개칭.
  • 1975년 10월 1일 :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 손곡리 전역이 경주시로 편입되어 천군동으로 운영.
  • 1986년 5월 1일 : 아동지역의 기존 천군1동이 편입되고 암곡동과 덕동, 황용동이 편입되면서 보덕동으로 개칭.

유래

  • 보덕동은 동쪽으로는 양북면과 포항시 장기면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월성동, 남쪽으로는 불국동, 북쪽으로는 천북면과 경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7개의 법정동과 12개의 행정통, 40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구는 2,072명<2016년 3월 10일 현재>이며, 면적은 80.96㎢입니다. 매년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보문관광단지를 포함하고 있어 가히 「관광경주의 얼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천군동
    • 지역여건

      보문호의 남쪽에 접해 있는데 동쪽으로는 양장산의 도투락 목장이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명활산에 둘러싸인 평지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길게 골짜기로 들어가며 이루어진 남소북대의 지형으로 된 부채꼴 모양의 동입니다.

    • 유래

      천군(千軍) - 조선초기 마을의 내(川)가 활(弓)과 같이 생겼다 하여 천궁(川弓)이라 칭했다고 합니다. 신라 20대 자비왕(458~479)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명활산성에 약 천명의 군사가 주둔하여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성에 올라가 나라를 지킨 곳이라 하여 천군(千軍)이라 합니다. 본래 이름이었다는 천궁은 1913년경 일제시대 천궁과 그 음이 동일하다 하여 동명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비슷한 천군으로 개정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이 군(軍)자가 마을 이름으로 좋지 않다고 여러 차례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만약 일인들이 천궁을 천군으로 개칭하였다면 일본의 적을 치기 위해 신라 때 군사가 주둔했다는 천군을 썼을 리 없을 텐데 그렇다면 천궁과 천군은 유이음이니 1914년까지 천궁에 가까운 발음으로 불리어오던 것을 천군이라 했지 않을까요?

      • 피막(避幕) - 피막못의 안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서쪽으로 산을 넘으면 동방동이 됩니다. 이곳은 안동권씨가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막을 치고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유이음으로 필막 또는 필막골이라고도 합니다.
      • 청단(靑丹)마을 - 천군동의 북편 서쪽 명활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신라시대 숲속에 자리하고 있어 푸른 마을이라는 뜻에서 청단이라 불렀다 합니다.
      • 강변마을 - 현재 경주월드 남쪽 길가의 마을로 신평천의 가에 자리하여 강변마을이라 하며 현재는 경주월드와 보문관광단지 주차장이 편입되고 길 남쪽으로 여러 가구가 있어서 식당 등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 천군 큰마을 - 피막골 입구와 구 동사무소가 있는 마을로 천군동에서 가장 많은 가구가 모여 살아서 큰마을이라 합니다. 서쪽에 청단마을과의 중간 지점에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 새마을 - 천군 마을에서 남쪽인 위쪽으로 들어가면 하천을 따라 동편으로 신축가옥으로 된 마을이 곧 새마을이며, 새마을 사업으로 취락구조가 개선되어 골기와 한옥으로 새 단장되었다 해서 불려지는 이름입니다.
      • 하리(下里) - 새마을의 위쪽 마을로 아동을 중심으로 골짜기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 아동(牙洞) - 대덕산 서쪽, 형제봉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종전에 천군1동으로 있던 지역입니다. 약 300년 전 김해김씨 김여양과 김해김씨의 김백진이 역적으로 몰려 김해김씨가 수난을 당할 때 고향을 등지고 피신하여 헤매다 정착한 곳으로 마을을 감싼 산세가 어금니처럼 생겼다하여 아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상리(上里) - 아동 윗마을이라고도 하며 마을의 위쪽에 있다 하여 상리라 합니다. 이곳에는 풍등지(豊登池)가 있어서 이 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 특성

      동제(洞祭) - 천군동 큰마을에서는 당수나무 밑에서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 두 차례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 오다가 요즈음은 3월 3일 한 차례만 지내고 있습니다. 제주는 마을 어른 중 귀감이 되는 분을 택하고 있습니다.

      • 전적지(戰跡址) - 명활산성은 신라시대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과 더불어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성으로 동쪽의 최후 보루였는데 이곳과 북군의 병사를 배치하고 지금 보문지의 협곡에 침입하는 왜병을 무찔렀습니다.
      • 보호수(保護樹) - 천군동 676번지의 느티나무가 시보호수 11-2-4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령 500여년이 되는 이 나무는 높이 20m, 둘레 5.8m이며, 이곳에서 동제를 모시고 있습니다.
  • 신평동
    • 지역여건

      명활산의 옛 성터 아래에 길게 누운 보문호의 1.62㎢의 넓은 호숫가에 위치한 마을로, 북쪽으로는 손곡동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덕동호 서편의 해발 256m의 낮은 산이 감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신평천을 경계로 천군동과 접해 있습니다.

    • 유래

      신평천의 지류에 1963년 9월 18일 보문호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황용, 덕동에서 시작된 많은 물이 흘렀던 계곡이었습니다. 골짜기 북편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섶들, 즉 숲이 있는 들이란 지명으로 내려왔는데 천군동과 더불어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듯 합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 때 경주군 천북면 천군리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신평리로 칭하다가 1955년 9월 1일 시제실시에 따라 신평동으로 고쳐 불렀고, 그 후 1975년 10월 1일 천군동으로 편입·운영 되었습니다.

      • 섶들 - 마을 앞 냇가에 울창한 숲이 있어서 숲이 들처럼 펼쳐졌다 하여 숲의 이곳 방언인 섶을 써서 섶들이라 하다가 1914년 일제시대 때 동명을 한자화할 때 신평(薪坪)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 특성

      1970년대 후반에 조성된 보문호수(48만평) 주위의 보문관광단지는 맑고 깨끗한 주변 환경과 아름다운 조경은 다양한 관광편의 시설로 국내외의 관광객을 맞고 있습니다.

  • 북군동
    • 지역여건

      보문호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길게 골짜기를 이루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작은 구릉으로 보문관광단지와 접하고, 북동쪽으로는 천북면 물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멀리 덕산의 산줄기가 뻗어 북동까지 감싸고 있고, 서쪽으로는 소금강산의 북쪽산이 280여m 높이로 막아섰으며, 남쪽으로는 보문호에서 시작되는 북천이 흐르는데 그 너머 명활산이 장중하게 우뚝 솟아 있습니다. 마을 앞부분인 보문로변에 신택지를 마련하여 거주하며 마을 북서편 골짜기에는 북군지가 있습니다.

    • 유래

      수도의 중심부와 그리 멀지 않으며 신라 때 마을 남쪽의 명활산성에 천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협곡을 경계로 북쪽에 군사들이 주둔하였기로 지명이 북군이라 하는데 이로 미루어 그 당시 촌락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1914년 4월 1일 면제실시 때 경주군 천북면 북군리로 편제되었다가, 1955년 9월 1일 경주시가 분리될 때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로 되었으며, 1975년 10월 1일 경주시로 편입되어 천군동에 속해서 운영되었습니다. 1986년 5월 1일 천군동이 인근의 암곡동, 덕황동, 정래동 일부와 더불어 보덕동이 되면서 현재 행정동인 보덕동에 속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 북군(北軍) - 신라시대 왜병을 막기 위해 명활산성과 남북으로 대치하여 군사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북쪽에 있는 군사란 뜻으로 북군이라 칭하였습니다.
      • 상북(上北) - 마을의 제일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으로 상북군의 준말이 상북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 중리(中里) - 마을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상북과 하북의 사이여서 중간마을이라 뜻합니다.
      • 하북(下北) - 맨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제일 아래쪽이기에 하북이라 합니다.
      • 강당골 - 옛날 청년들이 나무길에서 창을 쳐서 내기를 한 곳이라 합니다.
      • 동령골 - 마을 동편에 고개가 있다하여 그 동쪽 골을 동령골이라 합니다.
      • 잠매산 - 옛날에 안개가 자주낀다 하여 잠매산이라 합니다.
    • 특성

      전적지(戰跡址)인 마을 앞의 북천지역은 신라시대에 협곡을 이루는 장소로 명활산성과 이곳 북군에서 군사가 주둔하면서 동해로 침입하여 수도로 침입하던 왜병을 물리치던 장소입니다.

  • 손곡동
    • 지역여건

      동북으로는 해발 240m의 산이 온화하게 감싸 안은 이곳은 보문관광단지의 골프장과 천북면 물천리 사이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동쪽 산을 경계로 암곡동과 접해있어 동·남·북쪽이 산과 언덕으로 가려있고 서쪽과 서북쪽으로 골짜기를 이루며 트인 지형에 위치해 있습니다. 보문관광단지 동편 암곡으로 가는 어귀에서 시작된 폭10여 미터의 도로가 골프장을 끼고 돌아 마을 앞을 지나 물천, 동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유래

      연정이 있는 동쪽 산기슭에 절터가 있었고 석재가 수습된 것으로 미루어 신라 때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또 조선시대 말엽인 약 300년 전 손의일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때 풀이 많이 우거져 있다하여 자기의 성과 풀초(草)자를 연결시켜 손실(孫室)이라 칭했다하기도 하고 풀이 많아서 풀손(蓀)자를 써서 손실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1914년 면제 실시로 손곡리로 개편되고, 1955년 9월1일 시제 실시 때 월성군 천북면 손곡리로 있다가, 1975년 10월 1일 경주시로 편입되어 천군동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또 덕황동으로 통합되었다가 1986년 5월 1일부터 보덕동에 편입되었습니다.

      • 손실 - 임진왜란 때 피난하여 우거진 수목을 가리개로 삼고 최씨, 박씨, 고씨 세 성씨가 수목을 많이 키웠다 하여 풀 많은 마을이란 뜻의 손실로 불리어지다가 나중에 손곡으로 칭했습니다.
      • 연정 - 연지라고도 하는데 조선 숙종 때 최지덕이라는 사람이 부친의 산소를 따라 이곳에 와서 제자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면서 서당과 정자 앞에 연못을 만든데서 지명이 시작되었으며 아직도 연꽃이 있습니다.
    • 특성

      동제는 본래 갓안이라는 곳에 노송이 있어 예부터 마을의 재앙을 없애기 위해 지냈는데 지금은 마을 입구에서 정월 보름을 기하여 통장을 중심으로 흉일을 입지 않는 깨끗한 사람을 선정하여 제관으로 삼아 동의 안녕을 빌고 있습니다.

  • 덕동
    • 지역여건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길에서 암곡동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1977년 덕동호가 준공되면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고 동쪽 가장자리 산 중턱에 20여 가구만 살고 있습니다.
      덕동호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기울어 길게 남북으로 활처럼 동쪽의 산들을 감싸 안았고 그 가장자리인 동쪽의 기슭에 덕동교에서 암곡으로 들어가는 호안로의 길가에 마을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해발 200여m나 되는 이곳은 동쪽은 600여m가 넘는 가파른 황용산이 남북으로 길게 암곡까지 뻗쳐 있습니다. 이 지류인 괘정산이 500여m로 깎아 세운 듯이 북쪽에 있어서 암곡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산너머의 황용동과 산을 기점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호수 건너 낮은 약 260m의 괘정산을 두고 신평동과 경계를 이룹니다. 남쪽은 길게 호수가 끝나는 부분에서 촛대처럼 세운 듯한 만호봉이 뾰족이 솟아 있습니다.

    • 유래

      조선시대 중엽까지는 덕동과 암곡이 한 마을이었는데 그 후에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되었습니다. 이곳은 현재 수몰된 종전의 암곡마을에 고선사지탑이 있었고, 신라시대 왕이 동해로 납시던 길목에 위치하는 관계로 신라가 통일되기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1914년 4월 1일 면제 실시에 의해 내동면 덕동리라 칭하다가, 1955년 9월 1일 시제 실시 때 내동면 전역이 시로 편입됨에 따라 경주시 덕동으로 되었습니다. 1973년 7월 1일 법정동인 황용동과 더불어 덕황동으로 통합되어 운영되었습니다. 1977년 5월 31일 마을어귀의 신평동과의 경계지점에 남북으로 댐이 막아지면서 대부분이 수몰되고 현재의 가구만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86년 5월 1일 인근의 천군동, 암곡동과 더불어 보덕동으로 통폐합되었습니다.

      • 덕골 - 덕동을 일컫는 말이며, 이곳의 마을 사람들이 마음이 착하고 인심이 좋아 덕을 이룰 수 있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덕골이라 불렀합니다. 처음엔 암곡의 한 마을이었으나 규모가 커지면서 분리되었습니다.
      • 명실(明室) - 조선 중엽의 화봉괘정산 촛대와 같은 산에 불을 놓으면 괘정산 후면은 어두워 암곡이라 하고 전면은 밝아 명실이라 했다고 합니다.
      • 유리방 - 마을의 제일 남쪽에 위치하며 신라시대 유리보석을 캤다는 이야기와 혹은 유리를 구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로 인하여 유리방이라 합니다. 아마도 마을 남편에 우뚝 솟은 만호봉(470m)이 화산으로 화산재와 용암의 기포로 형성된 거품돌과 더불어 소금 같은 작은 수정체가 붙은 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이것을 채집하는 마을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 황용동
    • 지역여건

      경주시의 동 중에서 가장 험준한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황용동은 경주에서 감포 간 국도주변과 남북으로 길게 두 골짜기를 타고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해발 400여m의 백두산 줄기 경주시와 경계지점인 추령의 서쪽에 해당됩니다. 시부거리는 덕동호가 끝나는 지점에 있고, 사시목은 해발 650여m 되는 동대봉산이 있어 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산을 하나두고 동쪽으로 국도를 따라 모차골에 다다르고 계곡을 따라 몇 군데의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 유 래

      신라 때 문무왕이 동해로 오갈 때 이쪽을 이용하여 그 당시는 적어도 길이 나 있었고 사람들의 거주 내지는 왕래가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경주시 구황동의 황용사와 다른 황용사가 있어서 황용이라 칭했다고 합니다. 1914년 4월 1일 면제 실시 때 경주군 내동면 황용리로 되었고, 1955년 9월 1일 시제 실시에 의해 황용동이라 칭해 법정동이 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덕동과 함께 덕황동으로 운영되었습니다. 1986년 5월 1일 천군동, 암곡동이 보덕동으로 개편되었습니다.

      • 황용 -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시대 큰 사찰인 황용사와 동명의 다른 절이 이곳에 있었다고 해서 조선시대 들어와서 황용이라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라 30대 문무왕이 동해에 왜구가 침입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탄식하며 귀로에 현재의 토함산 중턱에서 휴식하면서 산천을 관망하니 단풍이 황색으로 물든 절경과 산세가 용의 머리 같이 생겼다 하여 즉석에서 황용이라 칭했다 합니다.
      • 시부거리 - 마을의 맨 서쪽이며 오천정씨가 약 200년 전에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에 진흙 구덩이가 있어서 이항이라 하다가 시부걸이라 개칭했다고 합니다. 현재 이 마을의 앞에 논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이 커다란 늪지대로써 이곳 방언으로 늪의 진흙땅을 시북이라 하고 구덩이를 구디라 하므로 시북구디라 칭하다가 시북이 있는 거리란 뜻의 시북걸, 시북거리에서 그 유이음으로 와전되어 시부거리라 칭해지는 것입니다.
      • 사시목(獅時目) - 이 마을은 황용동에서 가장 큰 마을입니다. 신라시대 표충사 앞의 산이 사자목과 비슷하다고 하여 사시목이라 칭했다는 설과 옛날 이곳에 사슴이 많이 살아 사냥꾼들이 사냥을 할 때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사슴을 잡는 길목이라 해서 사시목이라 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 가내동(觀海東. 楸院) - 신라시대 동해로 가기 위해 이곳을 거쳐 재를 넘었는데 그 산세가 너무 험하므로 1일 왕래가 불가능하므로 조정에서 원(院)을 짓고 관리와 행인들이 숙식하고 다니게 했다고 해서 추원이라고 합니다.
      • 모차골(毛車谷) - 신라시대 왕의 수레인 마차가 이곳으로 다녔다고 해서 마차곡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모차골로 발음되고 있습니다.
      • 참나무정(참나무징이) - 옛날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참나무 숲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하여 참나무가 있는 곳이란 뜻의 참나무징이로 불렸다 하고 한자로 표기하여 진목정(眞木亭)이라고도 합니다.
      • 절골(寺谷) -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건립한 큰 절이 있었으며 암자가 20여개소나 있었다 하여 절골이라 부릅니다.
        동제는 2개 자연부락에서 지내는데 사시목에서는 원래 섣달 보름과 정월 보름날에 지냈고 요즈음은 음력 6월 보름에 지내고 있습니다.
  • 암곡동
    • 지역여건

      동쪽에는 해발 664m의 황용산이 자리 잡고 서쪽으로는 334m의 왕산이 길게 북으로 누워 서쪽의 손곡동과 천북면 물천리, 갈곡리, 성지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북으로는 포항시 대송면, 오천읍과 맞닿아 있고, 남으로 덕동호와 덕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남북으로 길게 골짜기를 이루며 내(川)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마을에는 맑고 깨끗한 냇물이 흘러 경주시의 식수원인 덕동호로 흘러들고 있는 조용하고 수려한 산들에 묻힌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 유 래

      마을 남쪽 어귀였던 현재 덕동호 수몰지구 안에 신라시대의 고선사지(高仙寺址)가 있었고, 마을의 제일 안쪽에 무장사지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통일 전후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았고 이때에 마을이 열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조선초기에는 명곡이라 하다가 조선말엽에 암곡이라 하였다 합니다. 1914년 4월 1일 면제 실시에 의해 내동면 암곡리라 칭하다가 1955년 9월 1일 시제 실시 때 경주시 암곡동이라 하였습니다. 1986년 5월 1일 덕황동과 천군동이 편입되어 보덕동이 되었습니다.

      • 암실 - 원래 깊은 산골짜기의 안쪽이라 어두운 마을이란 뜻에서 암실 또는 암곡으로 불려왔습니다.
      • 왕생이 - 왕산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 왕이 난을 피하여 왕산 동편에서 피난 중 왕세자가 탄생하였다 하여 왕생이 또는 왕산이라 합니다.
      • 가와골 - 처음에 지씨(池氏)가 개척하였다고 합니다. 덕동호의 맨 북편에 처음있는 마을이며 제골 또는 가와골, 와동으로 불리며 이곳에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있었기에 기와굴이 와전되어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 계정 - 마을은 와동 동편 덕동호가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서편에 정각이 있고 그 오른쪽 편의 괴석에 계정이라 새겨져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계정이라 하며 1976년 덕동댐이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수중에 들어가서 산위로 마을을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음달말 - 왕산 동편의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로 음지에 해당되어 음달마을의 줄임말로써 음달말이라 합니다.
      • 시랫골 - 풍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의 지형이 떡을 찌는 시루형국이라하여 시루골이라 하다가 유이음인 시랫골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 특 성

      동제는 해방 전까지는 매년 12월 그믐날에 지냈으나 요즘 매년 음력 보름날 새벽 0시를 기해 마을 입구에 있는 당숲에서 동제를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