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북면

양북면에 대한 지명유래를 지역, 내용으로 구분하여 나타내는 표입니다.
지역 내용
어일리(魚日里) 1600년경 정응서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앞산의 지형이 고기 한마리를 닮았다하여 魚一이라 칭하여 오다가 1900년 초기 이후부터 魚日로 개칭 俗稱 장터라고도 하며 양북면 소재지로서 5일마다 시장이 개설되며 상거래가 활발하여 동해 3개 읍면의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 하였다.
와읍리(臥邑里) 사발바위에서 동산으로 이어지는 바위가 길게 누워 있었으므로 "臥龍"이라 하였다 하며 혹은 기와를 굽던 곳이라 하여 "왓골" 왯골"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중기리 등을 병합하여 와읍리로 하였다.
용동리(龍洞里)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龍頭 또는 龍洞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폐합에 의하여 龍洞里로 하였다.
권이리( 權伊里) 權伊는 약 250년전 난을 피해온 權氏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權伊라 불렀다고 한다.
호암리(虎岩里) 마을 앞산에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기이한 바위가 있으므로 그 바위의 이름을 범바위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호암" 혹은 범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안동리(安洞里) 조선중엽에 姜讚成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장차 이마을이 평온하고 부유한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안동 안골로 불렀다고 한다.
장항리(獐項里) 마을 앞산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장항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거 경주군 외동면 상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항리로 하였다.
범곡리(凡谷里) 옛날 석굴암 근처 사는 범이 자주 이 마을에 나타나므로 처음에는 虎谷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凡谷.범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입천리(卄川里) 형제봉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스무길이나 되며 내(川) 양편 하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스므내" "이십천" 혹은 "입천" 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스무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내를 이루므로 스무내로 하는데 이 스무내의 아래쪽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그대로 스무내(卄川)하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송전리(松田里)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솔밭" 혹은 "송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죽전리(竹田里) 영월 엄씨(嚴氏)가 개척한 마을로 큰 대나무 밭 밑에 마을이 있어 "대숲" "대숲말" "대밭" 혹은 죽전(竹田)이라 불렀다. 또 마을 밑에 대수못이 있으므로 죽연(竹淵)이라 부른다고 한다.
두산리(斗山里)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으므로 乭山, 乭山里, 斗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용당리(龍當里) 신문왕의 부왕인 문무왕의 成龍護國의 유언에 의해 수중릉을 만들고 유덕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창건하여 용이 출입할 수 있는 지하 수로를 만드니 수십길의 용소가 생겨나서 "용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龍堂", "돌담", 용담리( 龍潭里)라고도 하는데 "돌담"은 용이 못(潭)을 돌았다는데서 나온 말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龍潭里와 院堂里를 병합하여 龍堂里로 하였다.
구길리( 九吉里) 구길(九吉)은 마을 앞에 대종천(大鐘川)이 흐르는데, 마을의 형태가 마치 거북이 꼬리 같다고 하여 구미(龜尾)라 불렀다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지역의 산이 거북이 엎드린 모양 같으므로 水北 , 水南, 前飛, 下里, 德音의 여섯 부락을 합쳐 龜吉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쓰기 어려운 "龜"자를 "九"자로 바꾸어 九吉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봉길리(奉吉里) 慶州 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때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鳳吉"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기 부터 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제공
  • 담당부서 : 시정새마을과 총무팀(☎ 054-779-6581)/
  • 최근수정일 :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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