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읍

안강읍에 대한 지명유래를 지역, 내용으로 구분하여 나타내는 표입니다.
지역 내용
안강리 신라 경덕왕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여 안강이라 부르던 것을 그대로 읍 소재지 마을명칭으로 부르고 있음.
양월리 신라 시대에는 양월방이라 하다가 약 70여년전 마을 주위에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달을 보면 마음이 쾌활하였다고 하여 양월이라 칭하게 되었음.
구강(자연부락) 조선태조가 안강현을 구성현으로 개칭할 때 마을의 동남쪽에 거북을 닮은 산이 있어 마을을 구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익재 이재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구강서원을 세워서 이마을을 구강이라 불렀다고 하며 거북은 물이 있어야 산다고 믿어 마을 앞에 연못을 파고 항상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부에서는 마을을 구강(江)이라 부르기로 함.
창마을(자연부락) 신라시대부터 이마을에 군량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창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월성이씨가 많이 살아온 마을인데 이마을에는 용두지란 큰 연못이 있었다. 그 용두지로부터 수로를 만들기 위해 창석을 파헤치니 붉은피가 솟아 올랐다는데 그 후로는 월성이시 가문에 벼슬길이 막혔고 자식이 성하지 못했다 한다. 그 이유는 용두지의 수로를 파헤칠 때 솟은 피는 용의 머리가 잘린탓이었다고 한다.
칠평 옛날 큰 홍수가 져서 안강전역이 침수된 일이 있었다. 그때 현 양월6리의 칠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의 땅모양이 칠자형(七字形) 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각단, 신평, 양월 옛날 신라때부터 수양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양월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곳에 집이 들어서고 주민이 늘어나 새로 생긴 마을같다하여 새각단 혹은 신평이라 불렀다. 이곳은 광복전에 없었던 시장이 새로 생기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현재 안강읍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북부리 안강읍 소재지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북부리라 부르게 되었다.
개버들 현 안강2리와 안강3리 사이 근계 도로변에 개버들이란 지명이 있었는데 옛날 웅덩이 옆에 버드나무가 있어 개버들이라 불렀으 며 대추밭 각단에서 스며 나오는 물이 이 웅덩이로 들어와 수리 시설이 없던 시대에는 벼농사의 샘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볼수 없음.
대추밭 각단 현 안강5리의 사과밭 주변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한일 합병으로 일제가 경주군 강서면 안강리를 설치하여 행정을 할때 신사를 이곳에 두고 일본 천황에게 참배케한데서 유래됨.
육통리 옛날 대표적인 6개 자연부락(능골, 원당, 존당, 못밑, 학지, 거리마을)을 통칭하여 육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당 서기 1500년경 월성김씨가 개척하여 족친간 집단부락을 형성하였는데 인근부락중 제일 위쪽에 있다하여 으뜸원(元)자를 붙여 원당이라 칭함.
일설로는 고려시대때 이 마을에 원절이라고 하는 큰절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능골 신라 흥덕왕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 부르게 됨.
존당 고려대 존재선생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존당이라 하였는데 조선 말엽부터는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존당이라 개칭하였다.
못밑 신라 42대 흥덕왕릉을 축조할 때 지관이 능 앞에 못이 있어야 좋다고 하여 육곡 앞에 못을 막았다. 그 못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는 그 못이 존재하지 않는다.
황새말 · 학지 조선시대 정재우라고 하는 선비가 처음 개척 할 당시 마을에 참 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황새가 이 참나무에 와서 서식하였다고 하여 학지라 부르게 되었다.
소평 약 100년전 윤씨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넓은 평야 중앙에 있는 작은 구육이라 하여 소평이라 부르게 되 었다.
거리동 · 거리마을 신라시대 의창군과의 인적왕래가 많았다고 하여 거리동이라 칭하였음.
노당리 신라이후 조선시대까지 오래된 집이 많다하여 노당이라 칭함.
신라시대부터 안강에서 의창군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신라이후 조선시대까지 오래된 가옥이 많다하여 노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산대리 이조 정종때 권사악 선생이 처음 개척할 때 황지에 암석과 오대가 산과 같다하여 산대(山垈)라 불러 왔다.
셋터 · 새태 · 신기 원래는 홍천을 통털어 불리었고 마을의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새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늘어나서 마을이 새로 하나 더 생겼다하여 이조 말엽부터 새터라고 불렀다.
홍천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전 임진왜란 뒤 이 마을에 홍씨가 들어와 개척하였다고하여 홍천이라고 불리어졌다. 또 이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큰 개울이 흐르고 있어 비만 오면 큰 피해를 입었다 한다. 현재는 그때의 큰 개울이 없어졌지만 당시에 심어 두었던 개울가의 나무들이 고목이 되어 지금도 서 있다.
김생 · 김신이 · 금성 병자호란때 충청도 지방에서 거주하던 청아인 金城公 李地가 난을 피하여 영남으로 내려 오다가 이곳을 개척하여 지명을 금성이라 불렀다.
수일(水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전 청안 이씨와 설씨가 이 마을을 개척 하였다. 이곳은 안강읍에서 가장 물이 맑은 마을이라하여 수일(水一)이라 불리어 왔으며 현재는 공장이 들어서서 주민 모두가 이주하였다.
구부랑 피일동 앞에 위치한 마을로 논에 물을 댈수 있게 만든보가 굴곡 이 많으며 마을길의 모양도 꼬불꼬불하게 생겼다하여 구부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피일 임진왜란 당시 울창한 숲으로 싸여 있던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하였으며 피난중 식량이 부족하여 피를 흘려 먹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피일이라 불리어 왔다.
석정 300여년전 홍대명이란 선비가 이마을을 개척하였을 때 여기 장 군수라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를 칭하여 석정이라 하였다.
중말 · 중리 23여년전 밀양박씨가 개척하였으며 마을이 넓은 들판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리(中里)라 불리었음.
화전이.화전(花田) 100여년전부터 빅토에 목화재배가 성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눈 송이처럼 흰 목화가 만개하였기 때문에 花田이라 불렀다.
옥산리 자옥산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玉山이라고 불렀으며 원래 옥산 서원이 있는 골짜기 안의 마을을 지칭하였으나 현재 인근지역으 로 팽창 영,포 국도변까지 포함하는 큰마을이다.
민내 약 200년전 해발 300m 산에서 김씨성을 가진 사람이 산약을 구 하다가 실신하여 냇가에서 며칠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났다. 깨어나자 곧 이곳을 개척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개척한 마을 이라 하여 민내라 부르게 되었다.
계정마.계정 조선시대 영남 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 학문을 하면서 유생을 모아 강론한 독락당내에 계정을 두어 소요하며 즐겼다하여 계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곡리 지형이 火字의 형국이라 초기에는 마을 이름을 赤化五里라 불렀 다. 그런데 불이 자주나므로 불의화를 면하기 위해 마을 앞에 못을 축조하니 주산인 삼성산에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 노실이 라 했는데 1914년 하곡리라 개칭함.
절곡 400년전 절이 많이 건립되어 있던 골이라하여 절곡이라 전해오 며 빈대가 너무 많아 현재는 절이 없어졌다고 함
삼거리 자옥산, 어래산, 무학산 3개의 산이 보이는 중앙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며 삼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원다골, 원당골 옛날 원씨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하였다 하여 원당골이라 함.
서원마을, 섬마을, 서원촌 선조7년(1574) 이언적 선생을 추모여형하는 옥산서원을 하사 받은후 이곳을 서원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봄, 여름, 가을로 많은 관광객이 모여 들기도 한다.
중보 400여년경 설씨가 옥천에 보를 막고 정혜들이라 칭하였는데 그후 못을 막고 중곡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강교리 개척 당시부터 너더리, 양곡등으로 칭하다가 1780년경 권성이란 선비가 주산인 서쪽산이 이끼야(也)자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也日로 칭하다가 섬촌과 계곡마을을 건너다니는 교량을 널빤지 로 설치하였다하여 강교라 부르게 되었다.
두류리 현재 두류2리의 저수지 주위를 말하며 딱나무로 많은 종이를 만 들었다고 하여 딱실이라 불리어졌다.
화산골, 화산곡 마을의 산천경계가 빼어나고 봄철 산야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답기가 이를데 없다하여 화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박골 1580년경 우봉이씨가 처음 개척하였고 선비가 많이 났다고 하여 士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널기미 마을 뒷산의 산세가 거북등과 같이 생겼다하여 판구미라 부르기 도 하고 주위에서 가장오래된 마을로 산밑에 신령님께 제사지내 는 풍습이 있으며 오래지속되는 좋은 마을이란 뜻에서 널기미라 부르게 되었다.
점말 신라때부터 옹기굽는 마을로 조선을 거쳐 광복직전까지도 옹기굽 기가 성행했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근계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시내의 근원이라고 해서 근계라 칭함.
가마실, 금곡 조선조 추화씨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의 위치가 가마같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하여 가마실이라 하였음.
곤실 안강읍 칠평천 이남을 수남이라고 하는데 수남지역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은이가 많다고 하여 책권(卷)자와 열매실(實) 자를 써서 권실이라 하는데 차차 곤실이라 불리어지게 되었음.
갑산리 신라때 甲山寺의 이름을 따서 갑산이라 칭한 자연부락 명칭을 그대로 사용함.
대마을, 댓마, 죽촌 백제군이 침입하여 왔을 때 신라군이 패하자 말을 대밭에 숨겨서 피신하였다고 하여 죽촌대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들, 사평 홍수가 나면 이 마을에 모래가 많이 쌓인다고 해서 조선 순조때 박종식이라는 선비가 사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대동리 개척당시 골짜기라 넓다하여 한골이라 칭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동리라 칭함.
박동 한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박이 잘 되는 곳이라하여 박동이라 불렀다하며, 일설로는 박氏가 많이 살고 있다하여 박동이라 칭함.
검단리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솥모양 같다하여 금당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검단리로 개칭.
검단 약수탕 약 100년전 대 가뭄시 창씨성을 가진 사람이 개울따라 우물을 팠는데 청석에서 물이 솟는 것을 발견하고 더 많은 물을 얻고자 깊이 팠지만 그 깊이 외에는 물이 나지않았으며 거품이 섞인 물이 나와 그때부터 약수라 했으며 그 후 탄산수로 편성되었는 데 떫은맛이 있고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안태봉 안강읍과 현곡면 경계지역으로 신라때 한발이 극심하여 어느 임산부가 이 봉우리에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왔다고 하여 안태봉으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도 그 제단이 남아 있음.
사방리 형산강에서 범람하는 홍수를 막는다는 뜻에서 사방이라 불리어 오다가 그 후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士方里(사방리)라고 개칭함.
청령리 신라시대 처음 개척 당시 산골짜기마다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청령이라 불렀다.
자료제공
  • 담당부서 : 시정새마을과 총무팀(☎ 054-779-6581)/
  • 최근수정일 :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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